TV피플은 내 존재는 처음부터 무시했다. 그들은 셋 다, 그곳에 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은 문을 열고, 텔레비전을 방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둘이 텔레비전을 사이드보드에 올려놓고, 남은 한 명이 콘센트에 플러그를 꽂았다. 사이드보드 위에는 탁상시계와 잡지가 한 무더기 놓여 있었다. 시계는 친구들이 결혼 선물로 사준 것이었다. 매우 거대하고 무겁다. 마치 시간 자체처럼 거대하고 무겁다. 소리도 우렁차다. 타룹푸·쿠·샤우스·타룹푸·쿠·샤우스, 하고 방에 울린다. --- 「TV피플」중에서
그는 또다시 알 수 없어졌다. 그녀와 자는 것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복잡한 시스템의 일부가 잡아당겨져 지독히 단순해진 듯한 기묘한 결락감이 그를 덮쳤다. 자신은 이제 이대로 어디로도 갈 수 없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참을 수 없이 무서웠다. 자신이라는 존재가 그대로 녹아 없어질 듯한 느낌이었다. 그렇다, 그는 갓 생겨난 진흙처럼 아직 젊고, 시라도 읽듯 혼잣말을 했다. --- 「비행기-혹은 그는 어떻게 시를 읽듯 혼잣말을 했나」중에서
두 병째 와인이 나올 무렵에는 그는 이미 그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때로 맞장구를 치면서 귀기울이고 있었다. 아마도 그는 한참 전부터 누군가에게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테다. 그러나 아무에게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만일 그곳이 중부 이탈리아 작은 마을의 느낌 좋은 레스토랑이 아니었다면, 와인이 향긋한 1983년산 콜티부오노가 아니고 난롯불이 타오르고 있지 않았다면, 그 이야기는 이야기되지 않고 끝났을지도 모른다. --- 「우리 시대의 포크로어-고도자본주의 전사前史」중에서
내 일은 언니가 물소리를 듣는 걸 거드는 것이다. 언니는 물소리를 듣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있다. 사람 몸을 채우고 있는 물의 소리를 듣는다.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재능도 필요하고 훈련도 필요하다. 국내에선 언니밖에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언니는 그 기술을 아주 오래전 몰타 섬에서 습득했다. 언니가 수행했던 장소에는 앨런 긴즈버그도 왔고, 키스 리처즈도 왔다. 몰타 섬에는 그런 특별한 장소가 있다. 그곳에서는 물이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언니는 거기서 몇 해나 수행했다. 그 뒤 일본에 돌아와, 가노 마르타라는 이름으로 인체의 물소리를 듣는 일을 시작했다. --- 「가노 크레타」중에서
“안짱다리 여자와 사귄 건 처음이야.” “그래?” 딱딱한 미소를 떠올리며 여자는 말했다. 이 사람 취했나? 아니, 오늘은 술을 입에도 대지 않았을 터다. “그리고 네 귓구멍 속에 사마귀 세 개 있거든.” 남자가 말했다. “어머, 그래?” 그녀는 말했다. “어느 쪽일까?” “오른쪽. 오른쪽 귀 바로 안쪽에 사마귀가 셋 있어. 엄청 품위 없는 사마귀야.” “사마귀 싫어해?” “품위 없는 사마귀는 싫어. 그런 걸 좋아하는 녀석이 세상에 어디 있어?” 여자는 입술을 더욱더 꾹 깨물었다. --- 「좀비」중에서
그렇다, 나는 말 그대로 자면서 살아있었다. 내 몸은 익사체처럼 감각을 잃었다. 이것도 저것도 둔했고, 탁했다. 내가 이 세계에 살아서 존재한다는 상황 자체가 불확실한 환각처럼 느껴졌다. 세찬 바람이 불면 내 육체는 세계의 끝까지 날아가고 말리라 나는 생각했다. 세계의 끝에 있는, 듣도 보도 못한 땅으로. 그리고 내 육체는 내 의식과 영영 헤어져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무언가에 단단히 매달리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매달릴 만한 것은 어디서도 눈에 띄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