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UPAC에서 규정하는 원칙에 따라 새로 발견한 원소들은 신화 및 천체 관련 어휘, 광물, 지명, 원소의 속성, 과학자 이름 중 하나를 기반으로 하되 1~16족 원소는 -ium으로 끝나고, 17족은 -ine으로 끝나며, 18족은 -on으로 끝나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런 원칙이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이전에도 암묵적으로 지켜지던 규칙이긴 했지만, 특히 우라늄보다 원자 번호가 큰 원소들은 이 규칙을 충실히 따르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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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얻기 쉬운 것과 별개로, 화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옛날에는 납이나 주석이나 녹는점이 낮아서 가열하면 빠르게 녹아 나오는 것이 매한가지라 다 비슷한 물질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주석의 다른 이름이 ‘상(上)납’이라는 것을 봐도 오래전부터 우리 조상들은 납과 주석을 비슷한 금속으로 여겨왔다고 할 수 있지요. 옛날 로마 사람들도 두 금속이 색깔만 다르다고 생각해서 납은 plumbum nigrum(검은 납), 주석은 plumbum album(흰 납)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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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에서 이 금속을 수은(水銀)이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수은이라는 이름은 중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오래전부터 쓰인 이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동아시아 사람들 모두 수은이 ‘물처럼 흐르는 은백색 금속’이라는 점에 착안해서 이와 같은 이름을 붙였던 것이지요. 이런 생각은 서양에서도 비슷하게 했던 것 같습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수은을 부를 때 ‘물’을 의미하는 단어 hydor[휘도르]에 ‘은’을 뜻하는 단어 argyros[아르귀로스]라는 단어를 합쳐 hydrargyros[휘드라르귀로스]라고 불렀습니다. 한편 라틴어로는 수은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흘러 다닌다고 해서 ‘살아 있는 은’이라는 뜻의 argentum vivum[아르겐툼 비붐]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이 영향으로 현대 독일어에서도 똑같이 수은을 살아 있는 은이라는 뜻인 Quecksilber[크벡질버]라고 부르고, 이것이 영어에 유입되면서 quicksilver[퀵실버]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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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사람들은 녹색을 띠는 안료를 얻기 위해 구리(Cu)에서 녹청(綠靑)이라는 염을 뽑아냈는데, 이게 보통 까다로운 과정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녹청은 시간이 지나면 산화되어 점차 짙은 갈색으로 변색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를 대체할 물질로 각광받은 ‘셸레 그린’이라는 안료는 쉽게 합성할 수 있었고, 선명하고 안정적인 녹색을 띠는 덕분에 실내 벽지는 물론 옷에도 쓰일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셸레 그린이 만드는 녹색의 아름다움에 눈먼 사람들은 언제부터인가 원인 모를 증상을 겪으며 죽어갔습니다. 훗날 모든 원인이 셸레 그린에 포함된 비소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한때 많은 이를 매혹했던 이 녹색 안료는 두 번 다시 사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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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거대한 사진이 ‘브로마이드’라고 불린 이유는 사진이 빛에 반응하는 감광제로 브로민화 은(AgBr)을 사용한 종이 위에 현상되었기 때문입니다. 브로민화 은을 영어로 silver bromide[실버 브로마이드]라고 하기 때문에 줄여 부르기 좋아하는 일본인들이 이를 처음에 [푸로마이도]라고 부르다가 [브로마이도]로 정착했고, 이것이 한국 대중 문화에 유입된 것이지요. 대중 문화에서 화합물의 이름이 널리 사용된다니 조금은 의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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램지와 레일리 경은 다른 원소들과 반응하려 하지 않는 성질에 주목해서 고전 그리스어로 ‘게으르다’라는 의미인 argos[아르고스]에 금속이 아닌 물질들에 붙이던 -on을 더해 argon[알건]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만들었습니다. 과자 봉지 내부는 과자가 부서지고 부패하는 것을 막기 위해 질소 기체로 충전되어 있습니다. 질소 기체도 웬만해서는 다른 물질들과 반응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질소보다도 더 강력한 비활성 분위기를 만들어야 할 때는 아르곤을 씁니다. 그래서 거의 모든 화학 실험실에는 아르곤이 들어 있는 가스통이 있습니다. 게으르다는 이름을 가진 기체지만, 반대로 실제 실험실에서는 게으를 틈 없이 열심히 일하는 기체라고 할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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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미국의 LBNL 연구진은 원자 번호 98번 캘리포늄 Cf에 5번 붕소 B 이온을 충돌시켜 98+5=103번 원소를 합성해 냈습니다. 이들은 사이클로트론(cyclotron)이라고 불리는 입자 가속기를 개발하는 한편, 캘리포니아 대학에 LBNL을 설립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어니스트 로런스의 이름을 따 로렌슘(lawrencium)이라는 이름을 새 원소에 붙였습니다. 그런데 소련 측인 JINR에서는 IUPAC이 너무 성급하게 미국 측 발견을 인정했다며 반발했습니다. 이들은 1965년에 95+8=103번 원소를 만들었다고 주장하면서, 로런스와 같은 이름(Ernest)을 가진 뉴질랜드 태생의 핵물리학자인 어니스트 러더퍼드의 이름을 딴 러더포듐(rutherfordium)을 제안했습니다. 노벨상 수상자이기도 한 러더퍼드의 명성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JINR의 이런 제안은 LBNL의 자존심을 긁는 행동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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