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탕평군주로 일컬어지는 숙종(재위 1674?1720), 영조(英祖, 재위 1724?1776), 정조(正祖, 재위 1777?1800) 등은 학문 수양을 통해 성인군주론을 완전히 체득하였고, 군주이자 스승으로 불릴 수 있는 학자 군주〔군사(君師)〕의 면모를 유감없이 과시하였다. 청과 조선의 제왕들은 유교의 이상적인 국가를 현실 세계에 구현하기 위해 통치 체제를 재정비하고 사회 전반의 개혁을 직접 주도하였다.
결국 군주가 학문을 연마하여 사회의 변화를 주도하고 급기야 개혁에 성공하여 부강한 평화의 시대를 만들어 낸 동아시아와 달리, 새로운 변화에 부응하지 못한 서구의 절대왕정은 백성의 이반(離叛)을 초래하고 급기야 구체제(ancien regime)로 낙인 찍혀 혁명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18세기 평화기의 동아시아는 서양에서 흠모해 마지않던 이상향이었다. 유교정치 문화는 서구 사회에서 새롭게 발굴한 또 하나의 이상화된 사회로 인식되었으며, 계몽주의시대에 고대 그리스·로마 문명, 중세 기독교적 세계관과 더불어 새로운 근대 국가상을 꿈꾸는 데 활용되었다.(40~41쪽)
영조 치세 전반기에 거둔 성과만 평가한다면 아마 반대 정파에 이토록 관대한 군주는 없었을 것이며, 대경장에서 자신의 정책 지표를 제시하며 이처럼 신료들의 이견을 허물없이 받아들인 경우도 없을 듯하다. 영조는 반평생 인내하고 타협하면서 서로 다른 정치 세력을 모두 자신의 신하로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이제까지 영조시대에 대한 연구는 주로 황금기에 해당하는 영조 20년대 후반까지가 그 대상이었다.(81쪽)
영조는 즉위한 지 약 30년간 국정 운영에서 살얼음을 걷는 듯이 살았다. 당습일소(黨習一掃)를 내세웠지만 신료들은 어김없이 국왕의 탕평과 요순 입론 뒤에 보란 듯이 당론을 덧붙여 왔다. 영조는 때로는 단식 투쟁을 불사하는 고집으로, 때로는 자신의 분을 참지 못한 거친 표현도 함부로 하였지만 이내 사과하고 타협하였다. 상당한 인내로 신료들의 양보를 얻어 내어 소기의 성과를 내면서 본인의 정책 과제를 대부분 완결 지었다. 국왕의 정치 명분을 회복하여 국왕 주도의 정국 운영을 현실화하였으며, 문물제도를 대대적으로 정비하여 국가 체제를 일신하였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세제를 개편하여 국가 재정과 소민의 안정에 힘썼다. 왕위와 관련해서도 영조 25년(1749)에 일찌감치 왕세자에게 대리청정을 하도록 함으로써 후계 구도를 확립하였다. 그리하여 영조는 재위 20년대 후반까지 국제(國制)를 정비하고 균역법을 완성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사회 부문의 개혁을 마무리하였다. 그는 회갑을 맞이하여 왕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영예를 향유하였다.(128~129쪽)
영조의 정치 명분은 요순정치에 있었다. 이것은 재위 초반 국왕과 신료들이 함께 표방한 공통의 이상정치였다. 그는 요순의 절대 권위를 바탕으로 당대 현실을 유교적 이상사회로 변모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요순을 전면에 내세웠기에 그는 백성의 문제에 유달리 집착하였다. 요순같이 백성을 아낀 성군이 되는 길만이 자신의 정치 명분과 왕위의 정통성을 높이는 길로 여긴 듯하다. 영조의 전제화된 권력은 요순정치 입론의 절정에 달한 모습으로 이해되며, ‘민국(民國)’만이 주요한 논제로 부각되었다.(139쪽)
왕정 사회에서 신왕은 노련한 원로대신을 상대로 곧바로 전왕이 누리던 모든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 연소한 군왕은 자신과 함께하는 젊은 하급 관료들이 재상의 반열에 오를 때까지 연륜을 쌓아야 하고, 왕권을 온전히 행사하는 데 수많은 난간을 극복해야만 하였다. 영조는 조선에서 최장수한 군왕이자 가장 오랫동안 재위한 임금이었다. 재위 기간이 긴 만큼 정국 지형도 시대별로 변화를 겪었다. 이 과정에서 왕은 정치 경륜을 쌓으며 새로운 권위를 창출해 나갔다.(143쪽)
임금은 “백성이 거할 바가 정해지면 천명은 보존되고 백성이 곤궁하면 떠나가니, 이는 오직 한 사람에게 달려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늘이 자신에게 명하여 임금이 되게 한 것은 임금을 위한 것이 아니고 곧 백성을 위한 것이며, 천명의 거취와 민심의 향배는 오로지 이 백성을 구제하고 구제하지 못하는 데 있다고 표현하였다. 더욱이 애민군주가 되지 못하면 역성혁명의 대상인 독부(獨夫)에 지나지 않는다는 과격한 발언도 불사하였다. 영조는 백성을 도저히 내버려둘 수 없다고 선언하면서 임금으로서의 강한 사명감을 불태웠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민국(民國)에 온몸을 바쳐 왔다고 자평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것은 전통적인 애민 의식보다 훨씬 진전된 군주관이자 백성관이었다.(227~228쪽)
영조 17년(1741) [어제대훈]을 반포하자 왕은 정치적 명분에서 안정을 되찾았다. 영조는 점차 어제서를 적극적으로 편찬하여 자신의 정견을 대내외에 알리기 시작하였다. 이후 영조 20년대 초반 정국은 국가적인 경장 사업에 몰두하였다. 영조 20년대 중반에는 대리청정이 실시되었으며, 후반에는 균역법이 완성되었다. 영조 30년대 접어들면서 회갑을 맞이한 국왕은 더는 숙원 사업이 없다고 자임할 정도였다. 이 과정에서 군주의 위상을 제고하는 존호 가상 운동까지 성사되었다. 왕은 이전과 전혀 다른 차원의 군주상을 향유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259쪽)
친정 후 고종은 영조뿐만 아니라 정조에도 많은 관심을 두었다. 영조의 묘호를 추존하였고 숙종의 존호도 가상하였으므로 정조에 대한 것은 다른 차원의 단계별 추숭 사업이었다. 그래서 숙종에게는 존호를, 영조에게는 묘호, 존호, 시호를, 정조에게는 묘호와 제호를 올리는 방법으로 추숭 사업을 진행하였다. 탕평군주에 대한 흥선대원군과 고종의 한없는 존경과 흠모의 표현은 단지 직계 후손이라는 점 때문만은 아니었다. 흥선대원군에게 영조는 왕정 개혁의 모범이었다. 고종에게도 영조와 정조는 전통적인 개혁과 서구식 근대화의 절충점이었다. 무너진 왕권을 바로세우고 외세의 간섭을 물리치고자 왕정을 근대 국가로 전환하기 위해 노력한 고종이 이 시기 유독 영조에 주목한 것은 의미심장하다.(342~343쪽)
경장 사업을 비교하면 완전히 새로운 논점을 개혁의 범주에 편입한 숙종대의 정책은 여전히 과소평가되어 있다. 더불어 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면서 한 시대의 흐름을 바꾸고자 한 영조의 대경장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정조는 대단히 세련되고 정교하게 국정을 운영하였지만, 새롭거나 과단성 있는 개혁은 거의 시도하지 않았다. 정조 연간에는 숙종과 영조의 성과를 바탕으로 왕정 경장의 토대가 대부분 만들어져 있었으므로 정조의 급무는 체제의 안정화였다. 탕평군주인 세 왕의 우열을 가리기는 쉽지 않지만, 어느 한쪽을 과대평가하면서 다른 쪽을 과소평가하는 방식은 18세기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 상당한 걸림돌이 된다. 이 역시 이분법적 사고관에 기초한 선입견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탕평군주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각 왕대의 변화를 유기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또한 한 왕대의 정국 변화조차 시기별 역동성을 고려해야 하며, 정치, 사회, 문화, 경제, 사상 등 다면적 요소도 함께 살펴보아야 비로소 18세기 당대 역사에 부합하는 탕평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371~372쪽)
암울한 현대사에서 자행된 초헌법적인 통치 방식을 왕정의 군주에 비견하여 미화하거나 비판하는 것도 언어도단이다. 이것은 당대의 역사적 맥락을 무시한 일방적이고 단선적인 평가 방식일 뿐이다. 전통시대는 왕정의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하며, 현대는 민주공화정의 관점으로 접근해야 합리적이다. 어느 한쪽을 비판하거나 미화하기 위해 수백 년의 시간적 간극을 무시한 채, 전혀 다른 역사적 맥락과 정치 체제를 동일시하는 것은 실상과 괴리된 역사 인식에 불과하다.(377쪽)
영조는 확장된 국왕의 역할을 능동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정치 노선의 분열을 촉진하는 붕당의 활동을 용인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족의 언론 자유도 사실상 허용하지 않았다. 반면에 국왕 자신의 정견은 수시로 신민에게 윤음을 내리고 언해(諺解)하여 전국에 반포하였으며, 순문을 열어 직접 백성의 여론을 청취하고자 하였다. 기존에 사족이 누리던 자율적인 공론 활동을 일반 백성의 영역으로 바꾸어 버렸다. 양반 사족 내에서 군주를 지지하는 관인(官人) 그룹은 탕평당을 형성하여 경장을 주도하였으나, 나머지 사족은 확장된 백성의 범주에 편입되었다.(385쪽)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