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도, 아니 우리에게도 떡볶이나 닭꼬치를 씹으며 하루 일과를 정리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단 말이다. 일의 원인과 결과를 따져보고, 미래를 예측하고,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는 장소가 간절하게 필요했다. 오늘처럼 사건이라도 하나 터지는 날이면 더욱 그랬다.
“난 그 애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떡볶이 접시를 넘기며 수민이가 말했다. 나는 접시를 넘겨받은 후, 고개를 돌려 수민이를 보았다.
“응. 농담 아니고 진짜.”
묻지도 않았는데 수민이가 말했다.
“난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는데?”
“이해는, 생각한다고 되는 게 아냐.”
수민이가 내 손에서 접시를 가져갔다.
“그럼?”
“그냥…… 하는 거지.”
입안 가득 떡볶이를 넣고 우물거리며 수민이가 말했다. --- pp.8~9
메뉴판 아래에는 ‘임산부나 노약자, 심신 허약자는 사망에 이를 수도 있으니 메뉴 선택 시 매우 주의하시기 바랍니다’란 문구가 A4 용지에 인쇄, 코팅되어 떡하니 붙어 있었다. 물론 할머니 소행이었다.
“그 정도로 맵지는 않아.”
아무리 임산부나 노약자라 해도 떡볶이가 매워서 죽었다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나는 옳은 소리를 했을 뿐인데, 돌아오는 대답은 걸작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너처럼 독한 줄 아냐?” --- p.15
그렇다면 나는…… 나는 내 감정과 상관없이 그 여자와 절교하거나 친교할 수 있을까.
내가 그 여자를 거부하는 건 비단 아빠와 결혼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보란 듯이 집 안에서 엄마의 흔적을 모두 지워냈기 때문이기도 했다. 엄마가 쓰던 가구들을 모두 내다 버리고 새 가구들로 집 안을 채웠다. 장롱도 텔레비전도 냉장고도, 하다못해 세탁기까지 모두 다 바꿨다. 벽지도 새로 발랐다. 장판도 갈았다. 천장의 등도 새 디자인으로 바꿔 달았다. 바뀌지 않은 건 거실 바닥뿐이었다. 그러나 거실 바닥은 하도 쓸고 닦아서 엄마의 냄새가 조금도 나지 않았다. 집 안 분위기가 너무 달라져서 우리 집이 전혀 우리 집 같지 않았다.
아빠와 동생은 새집으로 이사하기라도 한 듯 마냥 좋아했다. 집 안에서도, 아빠와 동생의 기억 속에서도 엄마는 지워졌다.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인 것처럼. 완벽하게. 엄마를 기억하는 건 나뿐이었고, 그래서 나는 외로웠다. --- pp.85쪽)
나는 거기까지 듣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마음이 복잡했다. 동주 언니도 걱정됐고, 그 여자가 한 말도 얼마간 충격적이었다. 재혼한 건 아빠나 그 여자나 마찬가진데, 아빠는 백년손님이고 그 여자는 굴러온 돌 취급이라는 말 때문이었다. 맞다, 아니다,를 떠나서 나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문제였다. 만약 그 여자에게도 자식이 있었다면 내가 그 여자에게 하는 것처럼 아빠를 미워하고 증오했을까. 아빠가 보기 싫어서 집을 나가버렸을까. 만약 그런 상황이었다면 아빠는 상처받지 않고 지금처럼 잘 지낼 수 있었을까. --- p.125
우리는 청소를 시작했다. 가게 구석구석, 샅샅이. 탁자는 행주로, 바닥은 물걸레로, 벽은 삶아 빤 걸레로. 할머니가 날이 퍼렇게 선 도끼눈을 뜨고 우리를 감시했다. 청소가 다 끝나기도 전에 손님들이 밀려들었다. 가게는 할머니 혼자 할 때보다 더 붐볐다. 인근 학교들에 소문이 다 났다. 학생들 사이에 우리는 한 번은 반드시 관람해야 하는 진기한 구경거리가 되어 있었다.
손님이 있든 없든 우리는 앉을 수 없었다. 손님이 부르면 공손한 표정으로 즉시 튀어가야 했다. 손님이 떠난 자리는 잽싸게 치워야 했고, 싱크대가 넘치기 전에 설거지를 해야 했다. 물이며 고추장, 간장, 물엿 같은 무거운 것들을 날라야 했고, 수십 가지에 달하는 재료들을 알파고처럼 신속 정확하게 손질해서 대령해야 했다. 그리고 그 모든 일들이 우리가 가장 취약한, 속도와의 싸움이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든, 모든 행위 모든 장소에 할머니의 눈과 잔소리가 있었다. --- p.189
할머니는 툭하면 내게 시비를 걸었다. 틈만 나면 놀렸다. 나를 놀리는 데서 삶의 의미와 재미를 찾는 게 분명했다. 내가 없으면 심심해서 어떻게 살려고 걸핏하면 쫓아내겠다고 협박이었다. 그래도 본인 파악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했다. ‘마녀 할머니의 독 탄 떡볶이’라니.
“그 마녀 할머니 마실 가신다. 저녁 먹고 올 거니까 기다리지 마라. 아 참, 밥할 때 독 탔는데 처먹고 죽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라.”
손녀에게 태연하게 그런 말을 내뱉고는 밖으로 나갔다. 우리 할머니가 이런 사람이다. 하고 싶은 말에 거침이 없는 사람. 상대방에게 내가 어떻게 보일까 개미 눈물만큼도 신경 쓰지 않는 사람. 손녀가 먹을 밥에 거리낌 없이 독을 타는 사람.
나는 아영이와 수민이에게 전화해서 우리 집으로 오라고 말했다. 독 탄 밥 정도는 함께 먹어줘야 친구지.
--- p.1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