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우스콘서트가 이제 뿌리를 내리고 200회를 맞았다. 넓은 세상이 한 사람의 거실에서부터 바뀌는 기적을 확인하면서 21세기 스몰 그룹의 파워를 실감한다. 축하의 말과 함께 작은 축배의 잔을 올린다.
이어령(문학평론가)
박창수씨?… 아!… 프리뮤직…하우스?… 콘서트?… 집에서?… 콘서트?… 흠!…다소 생소한 곳에서의 나… 그리고 관객들… 어떨까? 궁금하다…발가벗은 채로 알몸으로 나는 친구들과 춤추고 있네…
그렇게 해서 난 또 색다르지만 여과 없는 소통을 경험하고 있다. 하우스콘서트를 통해서… 가끔, 또는 자주 또 하고 싶다.
강산에(가수)
내가 처음 하우스콘서트를 찾은 것은 2004년 초반, 지금으로부터 약 5년 전 일이다. 당시 어렸던 나는 항상 어떤 무대라도 서고 싶은 꿈 많은 학생에 불과했는데, 그때의 하우스콘서트는 그런 나의 바람을 실현하기 위한 최고의 장소였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물론 무대를 에워싸고 있는 스포트라이트, 사람들이 꽉 들어찬 큰 무대에서 연주하는 것도 행복하지만, 이곳만의 아늑하고 따뜻한 분위기는 그 어느 곳에서도 느낄 수 없는 것이기에 무엇보다 소중하고,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관객과의 거리는 연주할 때마다 나를 늘 긴장하게 만든다. 박창수 선생님의 하우스콘서트는 작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연주자와 관객의 열기로 그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소중한 소리를 만날 수 있고 아름다운 음악이 주는 힘을 느낄 수 있는 그런 곳이다.
김선욱(피아니스트)
문화를 알게 되는 온도는 몇 도일까. 하우스콘서트에 가면 온도계로 재어보지 않아도 그 온도가 만져진다. 2002년 여름 하우스콘서트를 취재하며 가슴에 담았던 풍경은 ‘삶 속의 문화, 그 자유’였다. 처음엔 이 땅에서 최초로 시도되는 음악회라는 취재보다, 1990년대 초반 행위예술을 하는 작곡가로 만난 박창수 씨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하우스콘서트를 찾았다. 그런데 지금 하우스콘서트는 시대의 자유를 측정하는 저울, 문화를 푸는 방정식으로 우리에게 성큼 다가왔다.
유인화(경향신문 제1문화부 부장)
무엇보다 박창수의 하우스콘서트는 특별하다. 음악가는 자신의 음악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팬들에게 둘러싸이고 관객이 앉은 자리는 어디나 유명 공연장의 VIP석이 된다. 모두가 주인공이다. 행복에 젖는다. 그래서 다시 찾게 된다. 상품이 아니라 ‘진짜 음악’을 매개로 행복을 나누려는 한 음악가의 꿈은 이제 현실이 됐다. 읽기만 해도 행복감이 밀려온다.
권복기(한겨례신문 공동체 담당 기자)
해가 뉘엿뉘엿 지는 풍경이 유리창 밖으로 보이고, 관객은 마룻바닥에 방석을 깔고 앉아서 두런두런 옆 사람과 이야기를 나눈다. 아이와 함께 온 엄마는 아이가 칭얼거리려고 하면 달래려고 계단을 내려가고, 바이올리니스트는 하이힐 대신 맨발로 무대에 오르는 이곳. 하우스콘서트는 음악 이전에 행복을 먼저 전한다.
김성현(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연주자는 무대를, 청중은 객석을 포기하고도 항상 매진 사례인 공연장이 있다. 공연장의 개념을 다시 정의한 하우스콘서트의 최대 미학은 관객과 연주자의 간극을 최소화해 소통(疏通)을 극대화시켰다는 데 있다. ‘소통’에 불이 붙은 그곳에선 연주하는 이와 듣는 이가 한마음으로 늘 신명이 넘쳐난다. 이웃집 사랑방을 찾듯 하우스콘서트에 걸음 하는 이들은 오늘도 새로운 음악의 역사를 써 나가는 ‘파워풀한 마이너리티’의 대열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강은경(공연기획자·음악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