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주의'라는 용어는 오늘날 하나님의 존재나 관련성을 부인하는 세계관을 의미하거나, 순전히 세속적인 세계관에 관심을 가진 것을 의미하는 정도가 된 말이다. 이것은 르네상스 때에 그 단어가 의미했던 바와 다르다. 그 시대 대부분의 인문주의자들은 종교적이었으며, 기독교를 제거하려 했다기 보다 기독교를 정화하고 갱신하는 일에 관심을 가졌다. '인문주의'라는 용어는 실제로 정의하기는 상당히 어려운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최근의 과거 역사에서, 인문주의에 대한 두 개의 주된 해석 노선이 우세했다. 첫 번째 노선에 따르면, 인문주의는 고전언어와 문학에 대한 연구에 공을 들인 운동이었다. 두번째 노선에 따르면, 인문주의는 기본적으로 새로운 르네상스 철학을 구성하는 일련의 사상이었다.
이제 분명해진 것이지만, 인문주의에 대한 이 두 가지 해석은 심각한 결점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르네상스가 고전 학문의 부흥을 가져왔다는 것은 불문가지의 사실이다. 헬라와 라틴 고전이 원어로 널리 연구되었으므로 인문주의가 본질적으로 고전시대 연구에 헌신한 학문적 운동이었던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인문주의자들이 '왜' 무엇보다도 고전을 연구하려 했는지에 대한 질문을 간과하는 것이다. 유력한 증거를 통해 볼 때 그러한 연구는 그 자체의 목적보다는 오히려 당대에 문장이나 말에 있어 수사법(eloquence)을 향상시키는 것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인문주의자들은 영감과 교훈을 얻기 위하여 문장 수사법에 대한 모델로서 고전을 연구했다. 고전에 대한 지식과 철학적 능력은 단순히 고대의 자원을 활용하는 데 사용된 도구였다. 종종 지적된 바와 같이, 문장을 쓰거나 말하는 데 있어서 수사법을 고취하는 데 헌신한 인문주의자들의 저술은 고전적 학문이나 언어학에 헌신한 저술들을 훨씬 능가하고 있다.
인문주의에 대한 몇 명의 다른 최근의 해석자들에 따르면, 이 운동은 새로운 르네상스 철학을 구체화했는데, 이는 스콜라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르네상스는 플라톤주의의 시대였더 반면에, 스콜라주의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시대였다. 다른 사람들은 르네상스는 본질적으로 반종교적인 현상이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18세기의 계몽주의라는 세속주의를 미리 예시하는 것이었다.
두 가지 주요한 난점이 이와 같은 꽤 야심찬 인문주의에 대한 해석을 가로막고 있다. 첫째로,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인문주의자들은 일차적으로 수사법 향상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인문주의자들이 철학에 중요한 공헌을 전혀 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하지만, 그들이 일차적으로 문학계에 관심을 기울였다는 사실은 여전히 유효한 주장이다. 따라서 '수사법의 추구'에 헌신한 사람들과 비교해 볼 때, 철학에 기여한 인문주의의 저술은 놀라울 정도로 적으며, 이것들은 일반적으로 다소 아마추어 냄새가 난다.
둘째로, 인문주의자들의 저술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는 '인문주의'는 놀라울 만치 이질적이라는 걱정스러운 사실을 밝혀주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많은 인문주의 저술가들은 진정으로 플라톤주의를 선호한 것이 사실이지만, 다른 이들은 텔레스주의를 선호했다. 이탈리아의 일부 인문주의자들은 진정으로 반종교적인 태도로 보이는 점들을 드러냈지만, 대부분의 이탈리아 인문주의자들은 철저하게 종교적이었다. 일부 인문주의자들은 진정으로 공화당원이었지만, 다른 이들은 그와 구별되는 정치적 태도를 보여주었다. 최근의 연구는 또한 인문주의의 덜 매력적인 부분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그것은 일부 인문주의자들이 마술과 미신에 빠져 있었다는 것인데, 이는 이 운동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와 조화를 모색하는 것을 어렵게 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인문주의'는 어떤 일관된 철학의 성격도 결여하고 있다는 점이 점점 더 분명해졌다.
남미의 식민종주국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이었다. 이들 국가는 16세기에 이 지역에 등장했다. 다음 몇 세기에 걸쳐 지배권이 강화되면서 선교 정착지가 확장되었고, 제수잇파가 크게 활약했다. 선교사들은 남미의 선교기지에서 북으로 이동했고 오늘날의 캘리포니아, 뉴멕시코, 텍사스, 아리조나에서 선교사역을 펼쳤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간의 영토분쟁으로 인해 선교사역은 종종 장애에 부닥쳤지만 18세기 말엽까지 남미는 포괄적으로 기독교화되었다. 더 근래의 발전은 특히 흥미로운데 이제 그 중 하나 - 남미 해방신학 - 을 살펴본다.
'해방신학(liberation theology)'이라는 용어는 이론상 압제적 상황과 관련된 신학이라면 어디에도 적용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실상 이 용어는 1960, 70년대의 남미라는 토양에서 유래한 아주 독특한 형태의 신학을 지칭하는 데 쓰인다. 1968년 남미의 가톨릭 주교들이 콜롬비아 메델린에 회의차 운집했다. 이 모임 - 흔히 CELAM 2로 알려진 모임 - 은 교회가 종종 그곳의 강압적 정부편에 섰던 일이 있음을 인정하면서 앞으로는 가난한 자 편에 설 것을 선언함으로써 이 지역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러한 목회적, 정치적 입장은 곧 공고한 신학적 토대로 보완되었다. 페루의 신학자 구스타보 구티에레즈는 『해방신학』(1971)에서 이 운동을 이끌게 될 독특한 주제를 도입했다. 이외에 주목할 만한 저술가로서 브라질의 레오나르도 보프, 우루과이의 후앙 루이스 세군도와 아르헨티나의 호세 미구엘 보니노가 있다. 후자는 한 가지 점이 특이하다 - 그는 카톨릭 저술가들이 주도하는 대화에서 신교(엄밀하게 감리교회)를 대변한다. 남미 해방신학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1. 해방신학은 가난한 자와 피압박자를 지향한다. "가난한 자는 기독교 진리와 실천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원천적 자원이다(소브리노)." 남미 상황에서 교회는 가난한 자의 편에 서 있다. "하나님은 분명 가난한 자의 편에 서 있다(보니노)." 하나님이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서 있다는 사실은 새로운 통찰력을 불러일으킨다. 가난한 자들은 기독교 신학의 해석상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모든 기독교 신학과 선교는 "밑에서부터", 가난한 자들의 고통과 번민과 함께 시작해야 한다.
2. 해방신학은 실천에 대해 비판적으로 반성한다. 구티에레즈가 명시하듯이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안에서 기독교의 실천을 비판적으로 반성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사회적 관여나 정치활동과 분리되어 잇지 않으며 그래서도 안된다. 서구신학이 활동을 반성의 결과로 간주하는 반면, 해방신학은 그 순서를 뒤집는다. 활동우선, 비판적 반성 차후. "신학은 세계를 설명하는 일을 그만두고 그것을 변화시키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보니노)." 참된 하나님의 지식은 무관심하거나 초연한 것이 될 수 없고, 가난한 자들의 복지에 참여함으로써 발생한다. 참여가 지식에 장애가 된다는 계몽주의적 견해에 근원적으로 반대한다.
이 점에서 해방신학이 마르크스 이론에 의지하고 있음이 분명해진다. 서구의 학자 중 다수가 이러한 이유로 이 운동을 비판한다 -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가 불경한 동맹을 맺었다고. 해방신학자들은 마르크스를 원용한 것의 정당성을 두 가지 점에서 옹호한다. 첫째는 마르크스주의는 "사회분석의 도구"이며 현재 남미사회의 본질에 관한 통찰을 제공하며, 가난한 사람들의 처절한 상황을 개선할 수단이 된다. 둘째, 마르크스주의는 현재의 불이ㅡ한 사회체계를 파헤치며 더 공정한 사회를 창조할 정치적 기획을 제공한다. 실제로 해방신학은 자본주의를 크게 비판하며 사회주의에 대해 긍정적이다. 해방신학자들은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스콜라주의자가 저술상 아리스토텔레스를 원용한 방식에 주의를 환기하면서 자기들이 단지 동일한 작업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 세속 철학을 동원해 본질적인 기독교 신앙에 실체를 부여하는 작업. 왜냐하면 - 이것은 꼭 강조해야 할 점인데 - 해방신학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애호와 배려가 복음의 근본적 면모이며, 남미 상황에서 발생한 짜집기나 마르크스주의 정치이론에 기초한 것만은 아니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