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필(權? 1569 ~ 1612) 본관 안동. 자 여장(汝章). 호 석주(石洲). 송강 정철(鄭澈)의 문인. 조선 중기 선조 때의 시인이자 뛰어난 문장가로 <홍길동전>의 허균과는 절친했던 친구 사이였다. 목릉성세(穆陵盛世: 조선 선조와 광해군 시대의 한문학을 말함)로 대표되는 당대 문단에서 동악 이안눌과 함께 양대산맥의 최고 시인으로 평가받았다. 과거에 뜻이 없어 시주(詩酒)로 낙을 삼고, 가난하게 살다가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끝내 취임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이후 세상에 뜻을 접고 강화부(江華府)에 갔을 때 많은 유생들이 몰려오자 석주 초당을 열고 이들을 모아 가르쳐 후학을 양성하였다. 이정구(李廷龜)가 대문장가(大文章家)로 알려진 명나라 사신(使臣) 고천준(顧天俊)을 접반하게 되어 문사(文士)를 엄선할 때 야인으로서 이에 뽑혀 문명을 떨쳤다. 문집으로《석주집(石洲集)》과 한문소설 《주생전》, 《위경천전》이 전해지고 있으며 강화도 송해면 하도리 고려산 기슭의 석주 초당 터에는 그의 후손 권체가 세운 <석주 권필 유허비>가 남아 있다.
조위한(趙緯韓 1567 ~ 1649) 본관 한양(漢陽). 자 지세(持世). 호 현곡(玄谷) ·서만(西巒) ·소옹(素翁).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덕령(金德齡)을 따라 종군하였다. 1601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609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갑과로 급제한 뒤 지평(持平) ·수찬(修撰)을 지냈다.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파직되었으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사성(司成)에 기용된 뒤 장령(掌令) ·집의(執義) 등을 지내고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을 토벌하고,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관군과 의병을 이끌고 항전했으며, 동부승지 ·직제학을 거쳐 공조참판에 이르렀다. 저서에 《유민탄(流民嘆)》 《현곡집(玄谷集)》 등이 있다.
홍세태(洪世泰 1653 ~ 1725) 본관 남양(南陽). 자 도장(道長). 호 유하(柳下) · 창랑(滄浪). 경사(經史)에 밝고 시(詩)에 능하여 김창협(金昌協) ·김창흡(金昌翕) 등과 수창(酬唱)하여 그들의 칭송을 받았으며, 1682년 통신사(通信使)를 따라 일본에 갔을 때 여러 사람들이 그의 시묵(詩墨)을 얻어 가보(家寶)처럼 간직하였다. 청나라 사신이 와서 조선의 시를 보고자 할 때 좌의정 최석정(崔錫鼎)의 추천으로 시를 지어 보였다. 이문학관(吏文學官) ·승문원 제술관을 거쳐 울산감목관을 지냈다. 저서로 《해동유주(海東遺珠)》 《유하집》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