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개의 성은 신안 주씨로,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에서 아버지 주달문과 어머니 밀양 박씨의 늦둥이 외동딸로 태어났다. 4갑술(갑술년, 갑술월, 갑술시 1574. 9. 3 밤)이라는 특이한 사주로 태어나, 아버지 주달문은 계집애지만 크게 될 인물이라 기뻐하며, ‘논개(개를 낳다)’라는 천한 듯 천하지 않고,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이름을 붙여 주었다. 논개가 다섯 살 되던 해에 병약하던 주달문이 죽고, 의지할 곳 없던 모녀는 숙부 주달무에게 몸을 의탁한다. 그러나 주달무는 노름으로 돈을 탕진하자 이웃 마을 세도가인 김 풍헌에게 조카를 민며느리로 몰래 팔고 달아난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논개 모녀는 부랴부랴 외가로 피신했으나 김 풍헌의 제소로 장수 관아로 끌려가 재판을 받게 되었다. 이때 장수의 현감이 최경회였다. 최 현감이 자초지종을 캐보니 달아난 숙부 주달무와 김 풍헌에게 죄가 있다는 것을 알고 논개 모녀를 무죄 방면한다. 그러나 갈 곳 없는 두 모녀는 최 현감에게 의탁하여 내아에서 잔일을 하는, 문서 없는 사노비의 처지가 된다. 박씨는 최경회의 부인 김씨의 시중을 드는 안잠자기에 따라마님이 되고, 논개는 무자리로 고된 일상을 시작한다. 가난하나마 양반 끄트머리로 평탄히 살다가 인생의 말년에 어리고 귀한 외동딸까지 곁에 끼고 관아의 노비로 전락하는 굴욕을 겪으며 박씨는 가슴에 병을 얻어 시난고난 앓게 된다. 논개는 그런 연약한 어머니의 기둥이 되고자 자신이 좀 더 단단하고 야물어져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친다. 최경회의 임지를 따라 이리저리 옮겨 다니던 논개는 같은 무자리인 한 살 아래 업이를 만나 친구가 된다. 그 후 호방의 아들로 통인인 박 지통과의 사건을 겪는 등 노비로서 자괴감의 시간, 모욕과 굴종의 시간, 인내의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흘러서 논개가 17세가 되던 1590년 담양 부사로 재직하던 최경회와, 김씨 부인의 주선으로 두 사람은 부부의 예를 올린다. 그해에 최경회는 모친상을 당하여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 화순으로 가고 논개는 고향 장수에서 그를 기다린다. 그리고 최경회의 삼년거상 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난다.
최경회가 의병을 모집하고 전라우도 의병장이 되어, 장수 월강리 앞 들판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의병들을 훈련시킬 때 논개는 동네 부인들을 모아서 의병들의 수발을 든다. 그 후, 최경회는 훈련된 500여 정예 부대를 골자 부대로 이름 짓고 무주 쪽으로 진격한 뒤 우지치 전투에서 첫 대승을 거두고 여세를 몰아 산음, 지례, 개령, 성주 등 경상도 일대를 누비며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둔다. 1592년 10월, 1차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최경회는 그간의 의병 활동 공로를 인정받아 1593년 4월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영전되어 진주성으로 입성한다. 그 소식이 들은 논개는 남복으로 변장하고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진주성으로 가, 최경회와 재회한다. 그리고 6월 19일, 왜군은 10만여 대군을 사방으로 나누어 진주성을 본격적으로 공격해 온다. 11일간의 피비린내 나는 혈투 끝에 진주성은 무너지고 7만에 가까운 민관군의 시체가 산을 이루고, 최경회, 김천일, 고종후 등은 끝까지 싸우다 도도히 흐르는 남강에 투신한다. 성이 함락되고 최경회가 순국했다는 소식을 접한 논개는 관기가 된 업이에게 부탁해 왜군들이 촉석루에서 벌인 전승 축하 연회에 참석한다. 촉석루 아래 강가의 바위 위에 서 있던 논개에게 육척 장신의 장대한 왜장 하나가 다가들고, 논개는 미소를 지으며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얼싸안고 최경회가 뛰어든 남강으로 흔연히 몸을 날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