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쓰고 번역을 한다. 그는 최근 새움출판사 블로그에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번역을 연재했다. 이미 수많은 〈이방인〉 번역본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굳이 그런 작업을 한 것은 그동안 우리 사회에 제대로 된 번역본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간 최고의 번역으로 불려온 ‘김화영 교수’의 〈이방인〉 번역본의 오류를 낱낱이 짚기도 한 이 연재는 일반 네티즌들뿐만 아니라 불문학도들로부터도 전폭적인 지지와 격려를 받았다. 그의 번역은 김화영을 비롯한 기존 번역자들이 일그러뜨려놓은 〈이방인〉 속 인물들의 원형을 되살려냈을 뿐만 아니라, 소설 번역의 진면목을 보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선생님이 정말 표절을 하신 겁니까? 물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아니 저분이 어떤 분인가? 평생을 한국문학을 위해 몸바쳐왔고 언제나 후학들에게 학문하는 자세가 어떤 것인지를 몸소 실천해 보여왔던 분이었다. 어려운 제자들에겐 사비를 털어 학비와 책값을 보태주기까지 하던 분이었다. 그런데 이제 서른도 안 된 젊은 친구가 선생님의 평생 업적에 오점을 남기려 하고 있었다. (144~145쪽)
“무슨 소리야, 이제 시작이야. 난 이거 큰 문제라고 봐. 한 분야에 정신적인 스승이랄 수 있는 분이 도둑질을 했다. 그런데 그걸 모두가 쉬쉬하고 감싸주었다면 이건 미필적 고의에 절도 방조죄가 돼. 아무리 훔친 물건으로 굶주린 자식들 배불리는데 사용했다 해도 절도는 절도인 거야.” “뭐 그렇게 어렵게 말해. 표절은 도적질이다. 그 이야기 아냐? (178쪽)
“그러게 말이지. 공자도 못 읽는 문자가 있고, 부처도 못 외는 염불이 있는 거지. 뭘 그걸 가지고 대단한 것 찾아낸 것마냥 호들갑인지. 그 어린 친구도 그렇지만 그걸 또 무슨 특종이라고 미다시까지 ‘문학비평계의 태두 김윤식 교수 표절했다’라고 뽑아서 장장 6면에 걸쳐 써갈기냔 말야. 그러니까 시대착오적인 잡지란 소릴 듣지.” (187쪽)
“학문의 초입에 있는 사람이, 또한 비평계의 말석에 있는 사람이 우리 근대문학 연구의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는 선배학자를, 또 평단의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고 현재에도 지침없이 현장비평을 수행하고 있는 선배 비평가를 비판할 때, 상당한 심리적 부담감이 동반되는 것임에 틀림없다. 또한 우리 사회처럼, 두드러지게 ‘장유유서’의 관행이 철저하게 준수되고 있는 곳에서, 이러한 작업은 자칫 ‘치기’ 혹은 ‘객기’의 산물로 오해될 수 있는 것이 현실적 상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작업이 우리 학계 및 비평계에 건전한 지성의 통풍이 될 수 있는 단 1%의 가능성이라도 존재한다면, 혹 그러한 가능성이 절망적일 정도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을지라도, 누군가는 묵묵히 이 일을 해나갔을 것으로 나는 믿고 있다.” (195~196쪽)
일부 사람들은 겨우 문장 일곱 군데를 베낀 것을 두고 표절이라 하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하는 식의 동정론을 펴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문제는 내가 논문에서 적시한 것보다 더욱 광범위하게 표절의 양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며, 혹여 타인의 저작으로부터 극히 일부만을 표절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변명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표절은 일종의 지적 사기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김윤식 교수의 연구업적 전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가 국문학 연구에 쏟은 혼신의 열정과 그 업적들을 마음 깊이 존중한다. 그러나 그런 그가 어떤 저작의 표절을 당연시했다면, 그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지식인에게 표절은 똘레랑스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지적 사기일 뿐이다. 때문에 이로 인한 책임은 철저하게 김윤식 교수 자신이 짊어져야 한다. (214~215쪽)
“왜 그 따위 논문을 써서 제멋대로 발표하고 난린가?” “그건 학술적 논의입니다. 비판적 문제제기일 뿐입니다.” “어떻게 자식이 아버지를 죽이려드나? 너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너무 강한 거 아냐?” “김윤식 교수가 선생님에겐 아버집니까? 그렇다면 도대체 선생님께서 누누이 주장하는 합리주의란 무엇입니까?” “동양적 합리성이란 것도 있잖아.” “권위에 대한 복종이 동양적 합리성입니까? 저는 그런 것 믿지 않습니다.” “자네가 그런 식으로 나오면 나 역시 자네를 제도적으로 매장시킬 수밖에 없어.” (219~220쪽)
대학원에서의 교수-제자 관계란 것이 워낙 특이한 형식의 주인-노예 관계인지라, 함부로 자신의 견해를 제출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미래는 막혀 있었고, 현재는 고통으로 가득찬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나는 대학을 떠나지 못했다. 내가 다니던 대학과 학과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왜 서울시립대학교 출신인 내가 서울시립대학교를 떠나야 하는가? (220쪽)
나는 오랜 고민 끝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지금 재학 중인 대학원에 자퇴서를 내겠다는 것이 그것이다. 미안하게도 적어도 나 자신의 연구방향과 관련하여 내 모교에는 희망이 없다는 판단이 든다. 학과 교수들과의 소모적인 싸움에도 지쳤다. 정당한 문제를 제기해도 이미 나는 ‘왕따’다. 금기를 건드린 자는 그 자신이 금기가 된다는 말을 폴 리쾨르는 『악의 상징』에서 적어놓은 바가 있다. 내가 바로 그 금기가 된 셈이다. 나는 이 현실이 비단 내가 소속되어 있는 대학만의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에서 파생된 하위 모순이다. 구조와 맞서 고립된 한 개인이 싸울 때 그에게 주어지는 것은 ‘희생양’의 딱지일 확률이 높다. 나 자신의 삶이 그것을 증거한다. (223쪽)
“꿇고 사느니, 서서 죽겠다. 나는 이 말이 내 마음속에 불러일으킨 날카로운 파문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23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