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시선을 돌려 현재의 자본주의에 대해서 말해보자. 자본주의는 무엇이며, 자본주의는 무엇을 ‘말하는가?’ 네 일을 해라! 즐겨라! 너 스스로 주인이 되라! 폭도들과 어울리지 마라! 창조적으로 행동하라! 너의 잠재력을 키워라! 자본주의는 결코 지킬 수 없는 자유를 약속했다. 자본주의는 얽히고설킨 개인들을 옭아매는 구속의 토대 위에서 개인주의를 생산했다. 자본주의는 개인들이 선택한 역할에 따라 자유를 분배한다. 그러나 개인들은 역할만 수행할 뿐이지 그 역할을 만들어낸 생산자가 아니다. 인간은 이런 역할에 갇혀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소비사회의 집단의식조차도 서양의 개인주의의 자립이념과 궤를 같이한다. 이 사실이 바로 우리 시대의 아이러니한 진리를 설명해주고 있다. 그리고 다른 것에 대한 소망, 진실한 삶에 대한 소망은 결코 개인들의 유전학적인 구조 안에 기록된 갈망이 아니다. 그런 갈망은 문화적이며 역사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생성된다. 바로 그 때문에 그들이 표현하는 몸짓은 결코 완벽하게 공허했던 적이 없다. 그들 안에 자본주의의 진실이 정확하게 나타나니까. 비록 오늘날에는 일상적인 자본주의를 이용하는 복잡한 활동들처럼 제각각 다른 방법으로 나타나지만 말이다.---‘래디컬 시크’ 중에서
마이클 무어에 대한 단순한 평가는 ‘저속하고, 개인주의적이며 가끔은 참을 수 없을 만큼 포풀리즘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모든 일을 단순하게 생각한다. 누군가는 그를 플린트 출신의 촌놈이자 가난뱅이들의 복수자로 낙인찍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지금 브로드웨이가 보이는 뉴욕의 이백만 달러짜리 호화판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어떤 사람들은 그를 진지하지 않은 인간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어는 뛰어난 점이 많은 사람이다. 그는 주변 환경을 철저하게 계산한다. 다시 말해 그는 현대인들이 엔터테인먼트의 시대를 살고 있으며 오락을 즐겨야만 직성이 풀린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헤게모니를 둘러싼 투쟁이 사회의 이데올로기 형성을 위한 범위 안에서 수행되어야 한다면 마이클 무어가 하는 일들은 쉽게 말하자면 디즈니월드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종의 계급투쟁이다. 그러한 계급투쟁의 주인공이 되려면 불가피하게도 어느 정도는 미키 마우스 편에 서야 한다. 무어는 겉보기보다 훨씬 더 영리한 사람이다. 그는 포풀리즘이라는 줄 위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지만 결코 환상적인 모반과 같은 심연 속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그는 좌파 애국자들의 편을 들기도 하지만 쇼비니즘Chauvinism으로 기울기 이전에 노선을 바꾼다. 단순하고 명징하게 생각하려면 똑똑해야 한다.---‘디즈니월드의 계급투쟁’ 중에서
혁명가들의 사상과 토니 네그리가 대변하는 내재성에 관한 사상은 실천가들이 추측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대립적이다. 혁명은 기다림을 아는 금욕과 같지만 네그리가 말하는 혁명가들은 당장, 말하자면 ‘지금, 여기 그리고 당장!’에 맞는 행동을 보여주고자 한다. “자신의 일을 위해 등장한 투사는 진실한 행복과 삶의 재미로 향하는 문을 열어 놓는다”고 네그리는 자전적 저술 『귀환』에서 밝히고 있다. 행동, 투쟁, 무언가를 창조해내는 일, 이러한 것들이 네그리의 신앙고백이다. 그는 “사실 나는 정열적으로 살지 못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고 털어 놓는다. 정열적으로 사는 것이 이 조용하고 나이 든 네그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위험한 사고방식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무언가에 반대되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는 웃는다. 그는 조용히 말한다. 사람들은 그의 나이를 가늠하지 못한다. 테러리스트라는 혐의 때문에 그가 감옥에서 보냈던 세월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그가 프랑스 망명시절 가슴 깊이 절감했던 내적인 공허함도 눈치 채지 못한다. 네그리는 호감이 가면서도 힘겨운 듯한 소리가 나는 하이톤 음성으로 “우리는 그저 앞으로 나갈 것이다”고 말한다. “우리는 단일성을 위한 새로운 구조를 구축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그는 마치 머리 위에 놓인 ‘단일성’을 부드럽게 쓰다듬기라도 하듯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린다.---‘삐딱한 생각이 아름답다’ 중에서
늘 되풀이 되는 지젝의 사상에 대해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경제운동은 세계의 몰락을 극단적인 현실로 여기도록 시야를 분명하게 열어주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그 누구도 더 이상 세계체제의 가장 작은 변화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다. 세계의 유한성은 현실적으로 나타났지만 자본주의는 영원했다. 예를 한번 들어보자. 지젝이 종종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 자본주의 안에서 결정되었던 ‘자유’ 만으로 설명하고자 했던 것처럼. “대부분의 엘리베이터 안에 있는 ‘닫힘’ 단추는 사람들에게 엘리베이터가 생각보다 빨리 작동할 것이라는 인상을 만들어주기 위한 아무런 효험도 없는 가짜약이다. 그 사실은 누구나 아는 것이다. 이러한 속임수에 의한 참여의 가능성이라는 극단적인 경우는 우리가 살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치과정에 개인들이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적절하게 은유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항상 반복되는 광경이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는 원주민들에게 마을의 구조를 그려보라고 했다. 위계질서의 계급에 따라 원주민들은 그들이 이룬 공동체의 지형에 대해 완전히 상반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두고 지젝은 헬리콥터 한 대를 빌려 상공에서 그 마을을 촬영한 것을 가장 상식에 가깝다고 일반 사람들은 주장할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거기서 왜곡되지 않은 현실성을 알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사회적으로 대립된 현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현실과 현실성, 상징적인 것, 정령적인 것, 기표와 기의. 이러한 개념들은 아주 다른 것이다. 이것은 프랑스의 심리분석학자 자크 라캉Jacques Lacan의 개념으로 지젝도 이를 수용하고 있다. 이 개념으로부터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의 이론이 나왔고, 그의 학문적 내용은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의 효과를 뛰어넘는다. 물론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지젝이 성공한 이유는 그가 이 개념 자체에 얽매이지 않았다는 데 있다.---선택 없는 선택’ 중에서
이것은 단순히 착취의 문제가 아니다. 또 타인에 의한 결정의 문제도 아니다. 문제는 한 사람이 자신이 속해 있는 시스템에 의해 마음대로 부려진다는 점이다. “누군가가 나의 삶을 대신 살고 있다. 나는 내가 아니다”라고 하이디 호는 말한다. 경제는 통제 불가능하게 되었지만 주체와 주체의 감정은 통제 가능하게 된 것이다. ‘내가 왜 누군가를 위하여 비정상적인 경제활동을 하고 있다고 느껴야하는지’ 전혀 모르는 것이다. 포스트포드주의 경제는 인격을 생산력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것은 아주 당연한 이치였다. 이제 경제는 점점 더 지식, 정보, 언어로 이루어지고 고객에 대한 서비스, 재화, 욕정, 명백함, 아름다움에 의해 촉발된다. 폴레쉬의 주인공들은 이론의 파편들을 내뱉는다. “조직적으로 너의 주체성의 가치가 이용당하고 있다. 정말 지랄 같은 일이다.” 또는 “더러운 신자본주의에 대항하여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기업이 되어버린 인간자체를 스스로 파괴하는 것뿐이다.” 그 주인공들은 그물망에 걸려 있으며 그물망 안에는 자본주의라는 것이 숨어 있고 그들 자신 속에도 들어가 있다. “나는 그물망 안의 자본주의를 열심히 보살핀다”라고 www-slum에 살고 있는 폴레쉬 연극의 한 등장인물은 말한다. “나는 여기 이 안에서 자본주의를 열심히 돌보고 있다! 그렇다, 이게 바로 나다. 그렇게 나는 여기 이 안에서 살고 있으며 자본주의를 더 이상 몰아낼 수 없다”라는 그의 말에 등장인물 B는 “그 어느 누구도 자본주의를 몰아낼 수 없다”고 대꾸한다.---‘나 없는 내 인생’ 중에서
팝 역사의 몰락에 대해서 조금 다루어보자. ‘문화’라는 것이 백 년 전, 아마도 오십 년 전에 자본주의의 ‘다른 것’, 그것이 비용이 들든 안 들든 하나의 가치를 지닌 것, 차별의 장을 최초의 위대한 대중문화 시대에 이르도록 성공적으로 마련할 수 있었더라면, 우리는 늦어도 20세기의 70년대에 커다란 격변을 체험했을 것이다. 문화산업은 문화를 완벽하게 식민화시켰다. 대중문화의 반항적인 잠재력은 돈벌이의 도구가 되어 시장화에 기여했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상품시장에서조차 실제적인 유용성을 발견하지 못한 상품들 즉 고유한 문화적인 특성―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회계나 원가계산으로 정확히 계산할 수 없는 부가가치 즉 잉여가치―을 지니지 못한 물건은 거의 팔리지 않게 되었다. 생산품의 가장 큰 가치는 그 생산품을 대변하는 삶의 방식이나 삶의 문화와 같은 이미지이다. 기업구조를 정확히 드러내지 않고 자기들이 직접 생산하지 않는 물건들에 대한 브랜드에만 신경 쓰는 판매망의 심장부일 뿐인 ‘나이키’와 같은 기업들이 이 시대에서 약진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바로 그 ‘나이키’의 심장부가 바로 이미지라는 결정적인 것을 생산한다. 상품의 생산은 불가피한 것이지만 결국엔 부수적인 것이며 제 3세계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공장에서 조달된다. 자본주의의 문화적 차원에 대해서 영국의 이론가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은 다음과 같은 명쾌한 문장으로 표현했다. “문화는 60년대부터 자본주의를 위하여 결정적인 의미를 얻으려했고 그 문화는 90년대에 들어서자 자본주의와 실질적으로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나는 고발한다’ 중에서
체가 자신의 이념을 실행에 옮기고자 할 때 보여준 폭력적인 단호함이 드러난다고 해도 그의 신화가 별다른 손상을 입지 않는 것은 바로 이 같은 그의 신념 때문이다. 그가 어떤 오류를 범했든 간에 그는 적어도 그 대가를 다른 사람들만 치르도록 놔두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탁월한 반反소비에트 아이콘이 되었다. 말하자면 그는 크렘린이나 혁명궁전에서 캐비아에 샴페인을 마시며 ‘새로운 인간형’에 대한 실험을 재가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철저한 ‘자기실험’을 하듯이 거기에 참여했다. 이것이 바로 그를 신비하게 만든 핵심이다. 결국 그의 성격 형성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친 것은 죽음에 대한 종말론적인 추구였다. 이를 입증해 주는 것은 비단 아프리카와 볼리비아에서 게릴라 모험을 하면서 그가 보여준 비현실적이고 그로테스크한 경솔함만은 아니다. 죽음에 대한 그의 종말론적인 추구는 그의 글, 게릴라 전법에 대한 그의 이론, 그리고 소련에 대한 그의 비판을 관통한다. 그는 소련의 지도자들을 겁쟁이라고 비난했으며, 공산주의 사회와 자본주의 사회 사이의 ‘평화공존’이라는 소련의 구상을 증오의 대상으로 받아들였다. 당시 체 게바라는 점점 더 급진적으로 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크렘린과 반틀리츠 사이에 있던 살찐 공산당 지도자들에게 가했던 비판은 전부는 아닐지라도 많은 점에서 옳았다. 하지만 그들의 자리에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자 했고, 1962년 미사일 위기 때 미국을 향해 날아갈 원자 폭탄에 점화하지 못하고 물러 선 소련 사람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았던 체 게바라가 앉아 있었다면 어땠을지는 생각만 해도 모골이 송연해진다. 그는 점점 더 폭력의 이론가가 되어 갔다. 이는 그의 단어 선택에도 영향을 미쳤다. 글을 쓸 때 그는 점차 ‘무장투쟁’이라는 용어를 버리고, 그 대신에 전혀 미화되지 않은 표현인 ‘폭력’을 사용했다. 이것이 ‘새로운 사회의 산파’라는 것이다. 마지막에 이르러서 그는 ‘투쟁을 극단으로까지 첨예화’하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다. 그리고 ‘미움’, ‘적에 대한 꺾일 줄 모르는 증오’에 대한 찬가를 불렀다. 즉 게릴라 전사는 ‘인류의 구원이라는 성스러운 일’에 복무하려면 모름지기 “효과적이고, 폭력적이며, 차가운 살인기계로 변해야 한다”.---‘나는 진리를 증명하려고 모험한다’ 중에서
브레히트, 벤야민, 브론넨, 베허. 우연히, 하지만 전적으로 우연적이지만은 않게 선택된 이 네 인물들. 성이 모두 B로 시작되는 이들이 살아간 길은 여러 차례 교차했고, 때로는 아주 친하게 지내기도 했다. 브레히트. 발터 벤야민의 설명에 따르자면 ‘처음부터 시작하기의 명수’. 벤야민. 한나 아렌트Hanna Arendt는 그를 일컬어 ‘가장 특이한 마르크스주의자, 그 특이함에 못지않은 운동을 불러일으킨 자’라고 했다. 브론넨. 인정받은 표현주의자로 나중에는 나치와 가까워졌지만, 그 후 다시 공산주의자로 변신한, 그래서 「프랑크푸르터 룬트샤우」가 ‘문학에서 가장 음울한 실개천’이라 불렀던 자. 그리고 베허. 소녀 살해범, 마약 중독자, 노선에 충실한 정당 공산주의자로서 스탈린 송가를 부르고, 독일의 반쪽 국가(독일민주공화국)에서 절망에 빠진 문화 관료로서 생을 마친 자. 이 네 사람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렇게 다른 성격을 지닌 인물들이 어떻게 한 가지 유형으로 묶일 수 있을까? 그 유형은 과연 어떤 것인가? 그리고 이 유형이 오늘날 우리의 관심을 끄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들의 공통점은 우선 이 네 사람 모두 이론의 여지가 없는 사상의 대가들이었지만, 오늘날에는 그 인기가 부분적으로 쇠락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폭력과 학살자들을 예찬했거나 적어도 자기가 그와 무관함을 표명하지 않았다는 점, 군대에 자원입대했다는 점, 또 이들을 반역으로 이끈 최초의 충격이 한낱 ‘경제적인 계급’에 지나지 않는 부르주아지에 대한 말 그대로의 증오였다는 점, 이들의 ‘공산주의’에는 언제나 세기말적인 생기론이 섞여 있었다는 점도 공통적이다. 오늘날 우리는 분명 이들을 만들어낸 상황으로부터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이들의 사례를 통해 서방의 지식인들이―판단력이 뛰어났던 이 똑똑하고 영민했던 사람들이―어떻게 테러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는지 이야기할 수 있다.
---‘그들은 어떻게 좌파가 되었을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