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사정을 알고 나면 추수감사절이라는 명절과 거대한 칠면조로 한 상 떡 벌어지게 차리는 식사가 영 마뜩잖게 여겨진다. 원주민은 지치고 굶주린 백인들에게 음식을 나눠 주는 선의를 베풀었지만 철저하게 배신당했다. 은혜를 원수로 갚았으니 배은망덕이라는 사자성어가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상황이 없다. 미국의 추수감사절 식사를 맛보니 그들도 명절에는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딱히 크게 맛있지 않은 음식을 단지 명절이라는 이유만으로 먹는 것. 물론 먹어 보기 전까지는 호기심이 없지 않았다. 미국 생활 첫 해였던 2002년 가을, 나는 설계 스튜디오의 급우들에게 물어보았다. 나 옛날부터 추수감사절 칠면조 맛이 정말 궁금했는데, 어때? 한 명이 심드렁하게 답해주었다. 닭고기 있잖아, 그거보다 더 퍽퍽해.
--- p.18~19
조리도 퍽퍽함을 증폭시키는 방향으로 할 수밖에 없다. 부피도 큰데 상징성을 깰 수 없으므로 반드시 통째로 익혀야만 하니, 웬만한 가정이라면 오븐 말고는 답이 없다. 요즘은 우리네 시장 통닭과 비슷하게 칠면조를 통째로 튀기는 게 유행이기는 하다. 집도 마당도 큰 미국에서나 가능한 조리법인데, 그나마도 해동이 안 된 칠면조를 냅다 끓는 기름에 담가서 폭발하는 사고가 왕왕 벌어진다. 차가운 칠면조 탓에 기름이 끓어 올라 화로의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것이다. 유튜브에서 ‘칠면조 폭발turkey explosion’으로 검색하면 (튀르키예에서 벌어진 폭발 사고와 더불어) 많은 영상을 찾을 수 있다.
--- p.20
비스킷은 미국, 특히 남부에서는 식사빵이다. 단맛이 스콘만큼 두드러지지 않고 주식에 곁들이거나 소시지 패티 등을 끼워 샌드위치로 먹는다. 형태도 확연히 달라서 스콘은 쐐기 모양이고 비스킷은 둥글다. 별 차이 아닌 것 같지만, 아무도 쐐기 모양으로 구운 쇼트브레드를 비스킷이라 부르지 않고, 스콘을 구워 놓고 비스킷이라 우기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 번역의 의사 결정은 정말 어안이 벙벙했다. 생각해 보라. 비스킷을 스콘이라 부르는 바람에, 삶에 찌들어 살던 20세기 초 딥 사우스 흑인이 갑자기 영국 음식을 먹게 돼 버렸다. 사소하다고도 여길 수 있는 음식 하나 때문에 번역된 소설에 감정 이입이 힘들어질 수 있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 p.28
이 냉장고의 전생은 훌리건이었을 것이다. 채 본격적으로 읽기 전에 멈칫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래? 하지만 스무 쪽 남짓한 이야기를 단숨에 읽고 나니 카스테라가 너무나 먹고 싶어졌다. 편의점에서 파는 공장제가 아닌, 내가 직접 만든 카스테라 말이다. 그래서 냉장고를 열어 계란을 꺼내고 밀가루를 체로 내렸다. 아, 내 냉장고의 전생은 무엇이었을까. 물론 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 p.81
총 6,984쪽, 902항목에 걸쳐 등장하는 하루키 소설 세계 속 음식들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고민 끝에 내가 옮긴 『식탁의 기쁨』에서 저자 애덤 고프닉이 소개한 분류법을 소개해 보려 한다. 《뉴요커》지의 고정 필자이자 칼럼니스트 고프닉은 소설에 존재하는 음식을 네 가지로 범주화한다. 첫 번째는 먹으리라 예상하지 않았던 등장인물에게 저자가 차려내는 음식이다. 두 번째는 등장인물 묘사를 위해 저자가 요리하는 음식이다. 세 번째는 저자가 등장인물과 함께 먹기 위해 요리하는 음식이며, 네 번째이자 가장 최근 나타난 것이 등장인물을 위해 요리하지만 실제로는 독자에게 돌아가는 음식이다.
--- p.103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샌드위치, 특히 오이 샌드위치는 나름 특별하다. 샌드위치치고는, 그리고 하루키의 장편에 등장하는 음식치고는 꽤 많은 분량이 할애된다. 대체 무엇이 중요해서일까? 등장인물 ‘나’의 입을 빌리자면 흥미롭게도 샌드위치 자체보다는 칼이다. ‘아무리 훌륭한 재료를 갖추었다고 해도 칼이 나쁘면 맛있는 샌드위치를 만들 수 없다’고 말하는 데서는 일말의 단호함마저 느껴진다. 나는 칼을 향한 이런 등장인물, 더 나아가 하루키의 시각과 태도를 이해할 수 있다. 샌드위치는 질감이 각기 다른 재료를, 질감이 현저히 다른 두 장의 빵 사이에 끼워 넣어 만드는 음식이다. 그리고 대체로 대각선이든 수직이든 반을 갈라 그 단면을 보여주는 게 핵심이다. 이는 재료의 구성미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편하게 먹기 힘든 식빵의 부피를 줄여주는 역할도 한다. 그런데 칼이 잘 들지 않으면 단숨에 단면을 경쾌하게 썰어낼 수도 없고, 재료들이 썰리지 않고 뭉툭한 날에 눌려 뭉개져 볼품도 맛도 없어진다. 그래서 맛있는 샌드위치에는 무엇보다 칼이 중요한 것이다.
--- p.111~112
집사, 즉 버틀러butler라는 직함은 음식과 관련이 있다. 고대부터 중세까지 술은 주로 도기나 나무통에 담아 보관했다. 유리가 발명되기 전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으며 술은 큰 예외 없이 와인이었으리라. 어쨌든, 도기와 나무통 모두 공기가 잘 통하는 탓에 와인은 1~2년이면 산화해 식초로 변하기 일쑤였다. 이처럼 술은 부피도 크고 변질되기 쉬운 자산이었기에 특별한 관리가 필요했다. 따라서 별도의 보직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당시에는 가장 믿을 만한 노예에게 맡겼으니 그게 바로 집사의 기원이다. 집사를 일컫는 영단어 버틀러는 고대 프랑스어 bottllier나 노르망디어 butelier, 즉 ‘병bottle을 책임지는 자’에서 비롯되었다. 『남아 있는 나날들』의 스티븐스와 같은 집사의 개념이 본격적으로 보편화되기 시작한 건 19세기, 특히 빅토리아 시대였다. 세계 각국에서 하인의 수가 점차 늘어나면서 이들을 총괄하는 집사의 중요성 또한 부각되기 시작했다.
--- p.177~178
메뉴로 보면, ‘바베트의 만찬’은 전부 7가지의 요리에 술을 짝지은 코스로 이루어져 있다. 독립된 요리가 시간 차를 두고 식탁에 등장하는 이런 코스를 학술 용어로는 ‘시간적 전개’라고 한다. 프랑스에서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아 세계로 퍼져서 프랑스 식문화라 여기기 쉽지만, 사실 러시아에서 도입되었다. 근현대 프랑스에서는 몇 차례 불세출의 셰프가 나타나 요리 세계를 재정립했는데, 그 첫 시도가 18세기 프랑스 혁명에 이루어졌다. 원래 페이스트리 셰프인 앙토넴 카렘이 러시아식 코스 서비스를 도입해 정착시킨 것이다.
--- p.2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