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두 커피 든 가방
가방에 원두 커피 봉지 넣으니 '킬리만자로'에 온 듯 책들이 그만 황홀해진다. 그대의 편지 하나 이메일에서 꺼내 가방 속에 넣는다. 가방을 조수석에 던지려다 꽃핀 화분처럼 벨트 조여 세워놓고
빨리 가고 싶어하는 옆 차를 선선히 앞세워 보내며 심호흡하며 봉천동 고래 상공을 헤집다가 이게 몇십 년 만이지 서울 하늘에서 낯달을 찾아낸다. 자작나무색 아 나무색 달.
--- p.81
예술도 언젠가는 사라지리라.
혹은 목마른 사람의 마음속 어디에
마른 씨앗처럼 붙어
언젠가 단비 올 때 다시 싹트곤 할까?
- 버클리 시편 2 홍순경에게 중에서
--- p.30
사람에게 온전 고독은 주어지지 않는다.
일부러 잘 간수한 마지막 우표 넣어둔 곳 잊고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아
아파트를 온통 뒤지고
내일 아침 부칠 편지 하루 미뤄야 할 때,
전화 벨을 울려야 할 친구에게서
끝내 소식이 없을 때
(그도 바쁠 테지
또 전화 걸면 독촉).
거실의 불빛 반으로 낮추고
샌프란시스코 하행선이 막히는
80번 도로를 물끄러미 내려다볼 때,
FM에서 흐르는 모차르트 바이올린 소나타 E단조
저 슬픈 바이올린.
뉘 알았으리
외로움과 슬픔이 이처럼 가까운 이웃!
마음과 음악이 만나 같이 여울지며 흘러가다
이윽고 잔잔해질 때
전화 벨이 울린다.
잘못 걸려온 전화.
수화기 속 사내의 사과 말
지금까지 들은 그 누구의 사과보다도 부드럽고 달다.
가만!
여권 속에 안전하게 끼워둔 우표를 찾아낸다.
외로움이 홀연 홀로움으로
--- p.
내 그대에게 해주려는 것은
꽃꽂이도
벽에 그림 달기도 아니고
사랑 얘기 같은 건 더더욱 아니고
그대 모르는 새에 해치우는
그냥 설거지일 뿐.
얼굴 붉은 사과 두 알
식탁에 얌전히 앉혀두고
간장병과 기름병을 치우고
수돗물을 시원스레 틀어놓고
마음보다 더 시원하게,
접시와 컵, 수저와 잔들을
프라이팬을
물비누로 하나씩 정갈하게 씻는 것.
겨울 비 잠시 그친 틈을 타
바다 쪽을 향해 우윳빛 창 조금 열어놓고,
우리 모르는 새
언덕 새파래지고
우리 모르는 새
저 샛노란 유채꽃
땅의 가슴 간지르기 시작했음을 알아내는 것,
이국(異國)햇빛 속에서 겁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