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저기 흩어졌던 글들을 모으고 정리해 이 책에 담았다. 읽으면 우울해지는 글을 쓰는 것은 곤욕스러운 일이다. 글쓰기도 노동인데, 포악스러운 사회의 민낯을 드러내고 인간의 밑바닥이 어디까지 추락했는지 그 깊이를 측정할 때의 기분이 좋을 리 없다. 현실을 피해버리면 나도 편하고 독자도 웃을 텐데 왜 이 고생을 하냐면서 주변 사람들이 한숨을 쉴 때마다 나는 다짐 또 다짐한다. 세상이 과거보다 좋아졌다고 오늘 힘들어하는 사람을 외면해서야 되겠는가. 배배 꼬였다고 누가 빈정거린들 나는 ‘읽으면 우울해지는’ 글을 멈추지 않고 쓸 것이다.
--- pp.6~7, 「프롤로그: 읽으면 우울해지는 글을 쓸 것이다」 중에서
물류창고 공사장에서 화재가 나서 38명의 노동자가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코로나19 위기를 잘 이겨내고 있다며 여기저기서 으쓱하기 바쁜 가운데, 마치 ‘이 나라가 선진국이라고?’라고 말해주는 참사였다. (중략) 뉴스 상단엔 ‘오늘의 산재사고’가 하루도 빠짐없이 등장하고 전문가들은 ‘어떻게 해야 사고를 줄일 수 있는가’를 논의하자. 코로나19의 입장도 이해하자면서 바이러스도 먹고살아야 하지 않냐고 말하지 않는 것처럼, 기업을 두둔하지는 말자. 고용노동부 장관은 정례 브리핑을 하고 지자체에선 단속하고 벌금을 물리고 소송도 불사하자. 나쁜 기업을 발견하면 역학조사해서 그딴 ‘발상의 전환’을 가능케 한 이론을 찾아내자. 그렇게 안 했으니 사람이 죽은 것이다. 안 하면 또 사람이 죽을 것이다.
--- p.23, 「1부 3장 뉴스 상단에 ‘오늘의 산재’를〉 중에서
‘차별의 설움’과 ‘노력의 허무’는 다른 층위에서 논해야 하지만,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한 줄 아느냐!”는 사람들의 한탄과 절규가 거세다. 이 심적 억울함, 무엇 때문이겠는가. 정규직 일자리 하나 얻고자 많은 걸 포기해야만 하는 이유는 그 일이 아니면 행복이 보장되지 않는 현실을 목도했기 때문일 게다. (중략) 국가는 이 ‘포기’를 줄여야 한다. 비정규직이 많아서, 청년들이 비정규직이 되기 싫어하고 일상을 포기했다. 그렇다면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이 객관적으로 좋아지는 것은 누군가가 꿈을 포기하는 것을 예방하고 청년들이 제한된 일자리를 얻고자 살인적인 경쟁을 하는 파국을 조금이나마 진정시킨다. 나아가 서로 간에 물어뜯을 이유도 제거한다.
--- p.76, 「2부 6장 동정 구하기가 아닌 물정 바꾸기」 중에서
시험은 노력한 만큼 결과를 얻을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다. 하지만 이 노력‘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요소가 사람마다 동등하게 주어질 리 없으니 우리는 ‘공부의 결과로만’ 모든 것을 평가하려는 버릇을 경계해야 한다. (중략) 어떤 부모님, 어떤 선생님, 어떤 지역, 어떤 미디어, 어떤 친구, 어떤 아픔, 어떤 방황, 어떤 무엇 등등 수천 개의 변수가 얽혀서 누구는 운 나쁘게, 누구는 운 좋게 현재를 살아가며 자신 기준에서의 ‘노력’을 하고 시험을 치른다. 그 결과가 ‘학력’일 뿐이다. 하지만 이를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규정하면 잘난 사람은 자기가 잘난 줄 알고 거만해지며, 못난 사람은 자기가 틀려먹었다고 자책할 것이다. 당연히, 불평등은 지속되고 더 벌어진다.
--- pp.93~94, 「3부 2장 공부 안 하면 노숙자가 된다고?」 중에서
N번방 안에서는 굉장히 질서 정연한 흐름이 있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곳에선 협상이 있었고, 돈이 거래되었으며, 소비자를 만족시키는 자가 철저한 자본주의의 법칙에 따라 많은 보상을 가져갔다. 자기들끼리 경쟁을 했고, 승자는 우쭐거렸으며, 패자는 말이 없었다. 누군가에게 그 방은 ‘열심히 살아도’ 되는 것 하나 없는 혼돈의 지상 세계보다 나름 정직한 법칙이 존재한다고 느껴졌을 것이다. 노력해도 월급 200만 원 벌기도 힘든 세상에서 ‘헤비’ 업로더가 되면 보상이 생기는 구조가 나름 블루오션으로 여겨졌을지도 모른다. 개척자가 되는 순간, 죄책감 따윈 사라진다. 가해자가 그러지 않았는가. N번방을 브랜드로 만들고 싶었다고.
--- pp.136~137, 「4부 5장 N번방의 사회학」 중에서
집값 상승을 전제로 도박을 한 사람들의 조바심은 대단하다. 아파트 앞에 장애인 복지관이 건설되면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는다. 쇼핑몰 입주 예정지라고 소문났던 곳에 임대아파트 수천 세대가 조성된다는 소식이 들리면 공공주택 건설을 반대하는 시위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들에게 집값 하락은 호재가 아니라 위기일 뿐이다. ‘반드시 집값을 잡겠다!’고 정부가 다짐할수록, ‘가만히 당하진 않겠다!’는 투지를 불태운다. 집에 인생을 건 사람이 넘쳐나니, 집값을 잡으려는 모든 시도가 인생을 건 반발심에 부딪혀 실패한다. (중략) 강박의 크기만큼 (내 집 장만을 하지 못한 자의) 자학도 커지고, (내 집 장만을 한 자의) 무례도 증가하지 않는가.
--- pp.175~176, 「5부 7장 집이 없어도 행복한 사회는 불가능한가」 중에서
나쁜 가치가 ‘다양성’의 이름으로 당당하게 노출되어 많은 사람에게 동의를 구하면, 민주적으로 차별과 혐오를 정당화하는 끔찍한 일이 발생한다. 그런 일은 많다. 자신의 동네에 장애인 학교가 들어서면 안 된다고 반대하는 사람들, 임대아파트 때문에 집값이 떨어진다는 현수막을 달아놓는 사람들을 보자. 행동 이전에 무슨 일이 있었겠는가. 사람들은 ‘모여서 서로의 의견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진심을 다해서 고민해서, 그러니까 민주적으로 진행된 회의의 결과가 차별과 혐오에 앞장서는 것이었다.
--- pp.213~214, 「6부 6장 위험한 민주주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