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無’자와 책을 엮게 된 연인
지금의 어떤 미모와 재능, 패기와 성취, 사랑과 행복도 그후에는 남김없이 부서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뒤집어서 물어볼 필요가 있다. “왜 승래해야 하는가.” “왜 행복해야 하는가.” 사실 우리는 공연히 행복에 얽매여서 행복을 잃고 있다. 자유에 얽매여서 자유를 잃고 있다. 소설이든 영화든 또는 현실이든, 그 스토리의 주인공이 성공하고 행복해야만 독자나 관객이 희열을 느끼고 감동하는 것은 아니다. ‘나를 지우고 세상을 보면’ 다시 말해서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음미하려고 하면’ 나는 지금 있는 그대로 자유로워지고 행복해질 수 있다. ‘무’를 생각하면 결과적으로 ‘관觀’을 하게 되고, 진정한 관객이 되면 해탈에 이르게 된다. 나는 무아無我의 음미와 대자유를 그리며 저 무자를 쓴다. ---‘책머리에’ 중에서
아무리 남에게 호감을 사고 싶어도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겸손이 비굴로, 친절이 아첨으로 오해될 수도 있다. 세상 전체 또는 특정한 상대가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나를 미워한다고 해서 내가 악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는 악과 선이 동시에 갖추어져 있다. 단지 상대가 나를 오해하고 있을 뿐이다. --- p.30
석가가 형상을 지우고 본다는 것은 시간공간이라는 포장을 뜯고 과거 미래의 숙세 인연을 전체적으로 내려다보고 측은한 마음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안으로는 무아의 정신으로 자신을 완전히 지우고 밖으로는 한량없는 다겁생래의 인연을 보고 자비심을 낸다는 의미에서 세상사 모든 것이 그대로 부처의 어머니라고 하는 것이다. --- p.45
남을 좋게 생각하거나 말하고, 여유롭게 남을 배려하고 그러면서도 나와 남이 조화를 이루는 기반을 다지려면 주변에서 일어나는 악을 여실히 관찰하되 흥분하거나 미워하지 않아야 한다. 악인을 역행보살로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또 자기 내부에서는 어떤 역행보살이 꿈틀거리고 있는지를 냉정히 살펴야 한다. --- p.80
방황하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여실히 관찰하면 ‘나’라거나 ‘내 것’이 허구임을 알게 된다. 얻으려고 하나 얻을 것이 없는 인간은 외롭고 우울하고 슬프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한 우리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면 유랑하는 모습 그 자체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된다. … 화엄경에서 쓰이는 ‘화엄華嚴’ 즉 ‘꽃의 장엄’이라는 말은 실제로 세상이 꽃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뜻이 아니다. 외로움과 방황과 무소득을 피할 수는 없지만 그 세상을 아름답게 볼 수는 있다는 말이다. 탐냄, 성냄, 허영마저 꽃으로 볼 수 있다면 세상의 그 어느것 하나 꽃 아닌 것이 없게 된다. --- p.87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곳에 행복이 있을 것 같아 경쟁이 치열한 쪽으로 머리를 들이밀어보면 오히려 좌절과 고통이 기다리고 있다. 행복은 다수결에 의해 정해지거나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이번에는 나홀로의 길로 가서 “나 스스로 행복하다”고 외쳐보지만, 고독감과 함께 “내가 제길을 가고 있는가”라는 회의가 든다. “반드시 행복해야 돼”라는 생각 속에 살다보니 우리는 어느새 짐꾼으로 변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행복해야 된다는 의무감이 우리의 무거운 짐이 된 것이다. 노예인지도 모른다. 행복에 보탬이 되리란 기대에서 우리는 사랑, 돈, 힘, 명예라는 족쇄에 묶여 그것들의 종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 p.102
줄 것이 없음을 깨닫는 것 이상으로 더 크게 더 많이 주는 것은 없다. 무력하고 재미없고 심심하고, 권태롭고, 따분하고 시시함을 철저히 사무쳐 느낄 때, 그곳에서 진정으로 누군가를 위할 수 있다. 이 이타심에는 자기과시가 없다. 진실로 위해도 그것의 참맛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상대의 문제다. --- p.185
우리가 나를 지우고 세상을 본다면, 세상은 항상 그대로 흐르고 있을 뿐이다. 억만년을 움직이지 않고 한 자리에서 세상의 변화를 보는 바위에게 무슨 무상에 대한 슬픔이 있겠는가. 변하는 세상은 임시적인 것, 가假의 것이다. 우리가 나를 지우고 보면 변하는 상태의 세계, 그 세계를 보는 우리의 번뇌가 그대로 불성이 된다. (…) 우리의 번뇌는 부처의 콧노래이거나 손가락질일 수도 있다. 불성에 자비의 방편이 더해지면 번뇌로 모습을 드러내고, 번뇌로부터 ‘나’를 지우면 불성으로 나타난다. 중요한 것은 번뇌를 피하고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지우는 것이다. 그리고 부처의 행을 지어서 나 속에 있는 본래부처를 알아보고 회복하는 것이다. --- p.249,253
우리를 괴롭히는 번뇌는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다. 수백생 수천생 무량억천만 다겁생래로 훈습된 업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흙을 이동하는 일이라면, 열흘 동안 져온 것은 열흘 동안 퍼내야 하고 백일 동안 퍼온 흙은 백일 동안 퍼내야 한다. 같은 이치라면 우리의 번뇌가 오랜 세월에 걸쳐서 훈습되어온 것이므로 오랜 세월을 닦아야 없앨 수 있다. --- p.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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