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생각들로 머릿속이 뒤죽박죽된 나는 반딧불이 채집에 흠뻑 빠져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응시했다. 그들은 휴대전화를 들고 반딧불이를 촬영하기도 하고 액정화면을 열심히 들여다보며 걷기도 했다. 휴대전화가 내뿜는 빛은 반딧불과는 다른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이의 마음은 저 반딧불이처럼 어슴푸레하고 아련한 정경을 품은 감성적이고 환상적인 세상이야. 그와는 반대로 어른의 마음은 질주하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처럼 압도적인 위력을 가졌겠지. 어쩌면 현대를 살아가는 아이들의 정신세계는 어른들이 쏘아대는 헤드라이트 불빛에 산산이 부서져버렸는지도 몰라. TV나 게임, 휴대전화 같은 가상현실의 영향으로 직접적인 인간관계나 현실감각은 형편없이 무뎌져 있을 거야.’
--- p.11
조카를 내 품에 안고 있으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수많은 감각들이 느껴졌고, 가슴속은 강하게 요동을 치고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 살아 있는 모든 존재의 행복을 기원하는 자애로운 명상을 실천하고 그렇게 가르쳐왔다고 생각했지만, 그때만큼 한 생명을 지키려는 의지가 불타고 아이의 행복을 위해 헌신하리라 다짐한 적은 없었다.
나는 그동안 결혼과 육아가 수행에 방해가 될 거라 여겼다. 그러나 조카를 품에 안아본 이후로 내 생각에 근본적인 전환이 일어났다. 어쩌면 나는 직접 겪어보지도 않은 일들을 무조건 부정하며 인생의 절반을 허비해버렸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범하고 일반적인 삶을 거부하며 오로지‘출가’라는 방식에만 매달려온 것은 아닐까 하는 자책감이 밀려왔다.
--- p.36
엄마들은 장난감을 빼앗긴 아이를 보고 대부분 이렇게 말한다.
“울지 마. 자 여기에도 장난감 있네. 이거 가지고 놀자.”
아이의 기분을 맞춰주면서 다른 장난감을 가지고 놀도록 유인하는 방법인데, 부모의 입장에서는 아이가 조금이라도 빨리 화를 풀 수 있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고 여기기 쉽다. 그러나 아이의 입장에서 보면 한창 열중하던 장난감을 갑자기 빼앗긴 데 대한 놀람과 슬픔, 분노의 감정이 짧은 시간에 사라질 리 없다.
그럴 때는 일단 “깜짝 놀랐지”, “많이 슬프겠구나”, “속상하겠다”와 같은 말로 아이의 기분을 충분히 헤아리고 위로해주면서 아이가 스스로 마음이 풀릴 때까지 울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아이는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솔직히 표현해도 된다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사랑스럽게 안아주고 위로해주는 엄마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애정을 갖게 된다.
가슴으로 안아주고 충분히 울게 해주면 아이들은 의외로 빨리 기분전환을 할 수 있다.
--- p.93
아이가 젖을 깨물었을 때 너무 아픈 나머지 엄마가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다. 그런데 이때 아기도 엄마의 신체적 반응을 감지하고 화들짝 놀라게 되며 소중한 것을 망가뜨렸다는 불안감에 휩싸이게 된다. 아기의 불안감을 그대로 방치하면 어른이 되어서도 이 죄책감이 무의식 속에 잠재해 있게 된다. 엄마가 재빨리 마음을 가다듬고 상냥한 목소리로 “젖을 그렇게 깨물면 엄마가 아프지? 자, 예쁘게 먹자” 하면서 젖을 물리면 아기가 안심하게 될 것이다.
--- p.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