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제 기술(예컨대 사진)은 휴머니티에 도전하면서 기술과 자연과 사회의 역기능적 관계(인간을 소품으로 전락시키는 관계)를 가시화한다. 인간의 소품화 경험은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1848)에서 말하는 노동 계급의 경험("기계 부품"이 되는 경험)에 그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유복한 가정에서 잡동사니 소품으로 빽빽이 채워진 거실의 진갈색 협탁 위에 장식으로 올려놓는 무거운 사진 앨범에 들어갈 자존감 증진용 사진을 제공하는 상업 사진의 세계에서는 인간이 곧 소품이다. 벤야민의 유년기는 사진을 접하는 좀 더 대중적인 통로, 곧 화보 신문이 출현한 때이기도 했다. 관련 기술이 급속히 발전한 덕분이었다.... 표지의 그림 이미지는 곧 사진 이미지로 바뀌었고, 1901년부터는 내지에도 사진이 실렸다. 보도 사진이 여기서 시작되었고, 사진 기자, 사진 사서라는 직업도 여기서 시작되었다.
('머리말―발터 벤야민과 사진의 탄생' 중에서/ p.9)
사진은 객관적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다. 화가처럼 대상을 주관적으로 미화하거나 기량 부족이나 기벽 탓에 대상을 왜곡할 위험이 없다는 뜻이다. 기계적 공정으로서의 사진은 세계와 모종의 직접적, 반영적 관계에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세계를 객관적으로 보여 주겠다는 약속이다....
그렇지만 이 객관은 때로 미끼로 전락할 수 있다. 벤야민에 따르면, 사진이 사회의 실상 내지 진실을 전달하는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사진이 진실을 전달하는 순간도 있고 사진이 거짓을 폭로하는 순간도 있지만, 사진이 피사체의 유의미한 면을 전혀 포착하지 못하는 순간도 있다. 사진 기술에는 표층을 충실히 전달하는 능력이 있는데, 표층은 심층과 다를 수도 있고 심층을 감추고 있을 수도 있다.
('머리말―발터 벤야민과 사진의 탄생' 중에서/ pp.36~37)
사진은 사회 작용들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사회 작용들의 원인이기도 한, 획기적인 그 무엇이다. 예술이 스스로의 사후생을 정당화하기 위해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신학으로 허둥지둥 뒷걸음질 친 것은 사진 때문이다. 새로운 소재/피사체subjects를 재현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것도 사진이고, 리얼리즘과 현실의 문제, 표층과 심층의 문제를 제기한 것도 사진이다. 가치를 묻는 질문(가격이 얼마냐, 예술적 가치가 얼마나 있느냐)을 하게 만든 것도 사진이고 수용자(갤러리에 가서 시지각 문화를 관람하는 수용자가 아닌, 매체에 동화된 수용자)와 새로운 관계를 맺은 것도 사진이다.... 사진이 삶의 일부가 되었을 때 삶은 변하고 있었고, 벤야민은 삶이 더 변할 수 있다는 데 내기를 걸었다.... 사진은 현재의 순간을 찍는데 사진에 찍힌 현재는 사진에 찍힌 순간부터 과거가 되기 시작한다는 것, 이것이 사진의 이상한 변증법이다. 아무리 새로운 순간도 사진에 찍히면 역사적 기록이 된다는 것, 이것이 사진의 운명이다. 현재라는 한순간의 이미지는 역사를 통해 극복될 수 있고, 사진은 기억의 부속물이 될 수 있다. 모더니티의 시대는 기술력에 의지하지 않는 기억을 생각할 수 없는 시대, 기억이 역사 기록자로서의 역할을 기술력에게 빼앗긴 듯한 시대다.... 사진과 영화를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를 결정한 것은 전통이 아니라 사진과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었다. 사진과 영화가 현대 생활의 필요 불가결한 일부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사진과 영화가 우리 상상을 좌우하게 되었다는 말은 사진과 영화가 우리 내면의 일부가 되었다는 뜻일 뿐이다.
('머리말―발터 벤야민과 사진의 탄생' 중에서/ pp.44~47)
카메라에 찍히는 대상은 눈에 보이는 대상과는 그 성질이 다르다. 무엇보다도 카메라에는 인간이 의식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무의식 공간이 찍힌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들의 걸음걸이를 놓고 대충 이러저러하다 평하는 일이 이미 꽤 흔해졌다고는 해도, ‘한 걸음 또 한 걸음’ 내디딜 때 사람의 동작이 초 단위로 어떻게 바뀌느냐고 물어보면 말문이 막힌다. 시지각적 무의식이라고 할 수 있을 이 공간을 열어 보여 주는 것은 바로 사진의 스냅 촬영과 화면 확대다. 충동의 무의식을 경험하게 해 주는 것이 정신분석이듯, 시지각의 무의식을 경험하게 해 주는 것은 사진이라는 뜻이다. 공학의 건축 구조나 의학의 세포 조직은 정취가 깃든 풍경화나 영혼이 깃든 초상화보다는 카메라와 원래 더 친하다.
('사진의 작은 역사' 중에서/ pp.98~99)
최근 사진 유파의 가장 눈에 띄게 잘한 일, 곧 피사체를 아우라로부터 해방시킨 일은 실은 앗제가 시작한 일이다.... 아우라가 뭐겠는가? 공간과 시간이라는 실로 짠 특별한 직조물이라고 할까,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단 한 번밖에 나타나 주지 않는 먼 곳이라고 할까. 어느 여름 한낮, 지평선에 펼쳐지는 산마루를 바라보는 누군가가 있고, 그에게 그림자를 드리우는 나뭇가지가 있다. 그 산마루나 그 나뭇가지에 머물러 쉬는 그 한낮을 따라가다 보면, 불현듯 먼 곳이 나타나는 때가 있다. 한순간일 수도 있고 한 시간일 수도 있는 그때가 바로 그 산의 아우라, 그 나뭇가지의 아우라를 호흡하는 때다. 그런데 대상을 자기 눈앞, 아니 대중의 눈앞에 ‘가까이 가져다 놓는’ 성향이 요즘 사람들에게는 매우 강하다. 복제를 통해 대상의 일회성을 극복하고자 한다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이렇듯 대상을 가장 가까이에서 장악하고자 하는 욕망, 대상의 형상Bild, 아니 모상Abbild을 향한 욕망은 날마다 점점 더 막강하게 확산된다. 여기서 말하는 모상, 예를 들어 화보 신문에 실리는 사진이나 영화관에서 트는 뉴스 화면은 형상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모상에 찰나성과 반복 가능성이 얽혀 있다면 형상에는 일회성과 영속성이 얽혀 있다. 대상을 둘러싼 껍질을 부술 수 있다는 것, 아우라를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동일한 형상들을 알아보는 지각이 발달해 있다는 표시, 일회적인 형상 앞에서도 복제를 이용해 동일한 형상을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발달한 지각의 표시다.
('사진의 작은 역사' 중에서/ pp.119~121)
그렇다고 [베를린 화보 신문]에 뭐라고 할 수는 없지 않나. 지금 유럽 대륙 전체에 조성돼 있는 대중 언론의 조건하에서 [베를린 화보 신문]보다 좋은 것이 존재할 수 없다는 걸 다들 알지 않나. [베를린 화보 신문]이 자랑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재미’는 은행원, 여비서, 옷 장수의 산만하기 짝이 없는 저질 주의력을 일주일에 한 번 한곳에 집중시킬 수 있는 오목 거울 같은 사실성, 오로지 바로 그 사실성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다들 알지 않나. 이 다큐멘터리적 사실성이 [베를린 화보 신문]의 힘이면서 동시에 정당성이다.... 대중 교육이라는 궁극적으로 극히 프티부르주아적인 이념 나부랭이를 떠들어 대는 것보다는 현재성의 아우라를 머금은 것들을 그냥 보여 주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일이고, 간접적이기는 해도 길게 보면 더 보람 있는 일이다. 밑바닥 본능에 대한 사변에 100퍼센트 의지하는 저 숱한 싸구려 현재성이 아니라 다만 50퍼센트라도 기술력의 성실성에 의지하는 현재성, 시원한 그늘이 되어 주는 현재성이 [베를린 화보 신문]에 있다고 한다면, 이 신문으로부터 글을 청탁받을 가능성이 없는(전혀 없는!) 필자라고 해도 악의 없는 중립성을 잃지 말았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화보 신문은 무죄!' 중에서/ pp.156~157)
무수한 눈동자와 카메라에 이 도시의 거울상이 맺혀 있다. 파리가 ‘빛의 도시Ville Lumiere’가 된 것은 파란 하늘 때문만도 아니고 저녁 큰길가의 네온사인 광고 때문만도 아니라는 뜻이다. 파리는 거울 속의 도시다. 차로 블록은 거울처럼 매끄럽고, 모든 식당의 앞문짝 유리는 여자들이 가장 자 주 쓰는 거울이다. 파리 여자들의 아름다움은 이 거울로부터 나온다. 여자는 남자의 시선을 받기 전에 이미 열 개의 거울에 자기 모습을 비추어 본다. 남자도 특히 카페 안에서는 거울의 홍수에 잠겨 있다. 거울은 실내를 좀 더 밝게 해 주고, 파리의 식당이나 카페에서 볼 수 있는 그 모든 비좁은 칸막이 공간에 탁 트인 느낌을 준다. 거울은 이 도시의 정령이 깃든 물건이요, 이 도시의 문장(紋章)이 새겨진 방패다. 그 방패에는 지금까지도 모든 문학 유파의 상징물들이 아로새겨져 있다.
('거울 속의 도시' 중에서/ pp.198~199)
특정 시대의 사회 구조는 특정 시대의 작품을 돌아보는 지금 이 시대가 어떤 시대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한 작품의 의미를 정의할 때 그 작품을 낳은 시대의 사회 구조를 감안하면서 정의한다는 것은, 그 시대로부터 까마득히 동떨어져 있는 시대들에게 그 시대로 가는 통로를 제공할 힘이 그 작품에 있다는 뜻이고, 그 작품의 의미를 그 작품의 영향사를 통해 정의할 수 있다는 뜻이다. 12세기로 가는 통로가 되어 준 것은 단테의 작품이었고, 엘리자베스 시대로 가는 통로가 되어 준 것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이었다.
('지젤 프로인트의 [19세기 프랑스 사진]에 대한 서평' 중에서/ pp.226~227)
바이마르 지식인 벤야민에게 사진은 인식의 훈련장이자 혁명의 시험대였다. "사진이 삶의 일부가 되었을 때 삶은 변하고 있었고, 벤야민은 삶이 더 변할 수 있다는 데 내기를 걸었다. 그가 사진에 ‘혁명적 사용 가치’가 있을 가능성, 사진이 사회의 해체와 재건에 일조할 가능성을 구상해 본 것은 그 때문이었다." 단, 벤야민에게 그 내기는 자기 삶을 소모하는 내기였다.... 더구나 그 내기는 일단 지는 내기였다. 벤야민이 독일 탈출 길에 오른 1933년은 [사진의 작은 역사]가 나온 다다음 해였고, 벤야민이 유럽 탈출 길에서 자살한 1940년은 [지젤 프로인트의 [19세기 프랑스 사진]에 대한 서평]이 나온 다다음 해였다. 벤야민이 정치적 "훈련 교본"으로 선전했던 잔더의 사진은 나치에게 소각당한 후였고, 벤야민이 최고의 "인간상"이 나온 토양으로 칭송했던 러시아혁명은 상속자의 이미지를 보정하는 에어브러시로 전락한 후였다. 미국 입국 비자가 있었지만 프랑스 출국 비자가 없었던 벤야민은 결국 유럽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로 세상을 떠났고, 그렇게 역사 뒤로 사라진 듯했다. 그렇지만 그의 글이 그 후 한 세대 만에 초(超)유럽 학계에서 첫 전성기를 구가했다는 것, 시간이 갈수록 그의 명성이 전공 독자와 일반 독자 모두에게 점점 확고해진다는 것은 그 내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일 수도 있다.
('옮긴이 해제' 중에서/ pp.241~243)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