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의 세계 경제가 영국의 산업혁명의 영향하에 형성되었다면, 19세기의 정치와 이데올로기는프랑스혁명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중혁명'은 이 두혁명을 지칭하는 것인 동시에 부르주아의 승리를 예견케 하면서도 부르주아 자유주의 혁명을 사회주의 혁명을 대체시키려는 대중들에게 채비를 갖추게 했다는 면에서 이중성을 가진다고 할 수도 있다.
1789~1848년의 혁명은 '자본주의적' 공업의 승리요, '중간계급' 또는 '부르주아적 자유사회'의 승리였으며,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하는 특정지역 겨제와 국가들의 승리였다. 그리고 이 세계 혁명이 가져온 두드러진 시계사적 결과는 몇몇 서구 정권(특히 영국)에 의한 지구의 지배가 확립되었다는 사실이다.
산업혁명은 인류역사를 통해 가장 획기적인 변화를 초래한 사건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농업과 인구에서의 혁명이 우선 길을 닦어 주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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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기 이후 서유럽 사회는 안으로 인구의 증가, 농업 생산의 증대, 도시의 부활 등으로 오랜 침체 끝에 수세의 입장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대외 진출을 꾀하고 있었다. 엘베 강을 넘어 독일인이 슬라브 땅에 식민 운동을 시작하였고,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이슬람교도에 대한 재정복 운동이 전개되었다. 무엇보다도 교황권의 신장, 이탈리아 상인과 봉건 제후들의 세속적 욕망, 성지 탈환 등 여러 요인이 복합되어 일어난 십자군 전쟁은 유럽 세력팽창의 대표적인 사건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십자군전쟁처럼 성스러운 이름에 가장 세속적인 욕망이 결합된 전쟁은 없으며, 신의 이름을 빌어 약탈과 살인을 자행한 전쟁은 없을 것이다.
전쟁의 발달은 예루살렘이다. 예루살렘은 유대인, 기독교인, 이슬람인 공통의 성지였다. 유대인에게는 다윗의 우물이 있는 어머니 도시요, 기독교에겐 예수가 죽어 부활한 곳, 이슬람교도에겐 마호메트가 머무른 곳이기 때문이다. 중세 유럽의 기독교들은 예루살렘 성지의 순례를 최대의 덕행으로 생각하였을뿐 아니라 동방의 진귀한 물건을 수입하여 얻는 경제적 이익 또한 적지 않았으므로 순례는 날로 성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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