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업다이크 자신은 <달려라, 토끼야>를 1950년대 말 미국인의 정신 세계에 대한 초상화로 이해했다. 죽도록 일하고 하느님과 미국과 가족을 사랑하는 모든 이에게 행복과 부와 평온함을 보장해 준다는 이른바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회의가 토끼의 불안감과 사회적 인습에 문제를 제기하는 그의 무분별하고 '비도덕적인' 태도 속에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다. 아메리칸 드림은 실현될 가망성이 거의 없는 꿈에 지나지 않는다. 업다이크는 무엇보다도 미국식 가정의 행복을 표적으로 삼는다. 겉모습 이면에 위기가 숨어 있고, 근본적으로는 모두 다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보여준다. 토끼의 아내 재니스가 집에서 아이를 분만한 지 얼마 안되어, 술에 잔뜩 취해 갓난아이를 욕조 속에 빠뜨려 죽게 하는 장면에서 소설의 악의는 정점에 이른다.
(...) <달려라, 토끼야>에서 업다이크는 제임스 조이스의 독백 기법을 능란하게 구사하고 있다. 하지만 수백만 명에 이르는 독자들 사이에서 업다이크가 그렇게 호평을 받으며 성공하게 된 이유는 그가 소설 주인공들의 불안과 실수까지도 수용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또한 토끼가 문학적인 인물로 널리 알려지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업다이크가 10년의 간격을 두고 이 인물을 계속해서 다시 형상화했기 때문이다. 1990년까지 토끼의 사회적 상승을 묘사하고 있는 장편이 세 편이나 더 발표되었다. 즉, 그는 자동차를 판매하는 부유한 사업가가 되고, 여전히 재니스와 부부 관계를 유지한다. 그러다가 결혼 생활은 흔들리고 환멸과 분쟁에 휩싸인다. <달려라, 토끼야>에서 세 살배기였던 넬슨은 마약중독자가 된다. 마지막 제4부에서 토끼는 자신의 며느리와 동침하다가 결국 56세의 나이에 심근경색증으로 급사하고 만다.
요약하자면 네 편의 '토끼' 소설은 1990년까지의 미국 풍속도, 다시 말해 아이젠하워 때부터 레이건 대통령 때까지, 그리고 페티코트부터 MTV가 등장하는 시대까지의 미국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토끼는 달 착륙과 성의 혁명, 히피족 시대와 1980년대의 여피족(1940년대 말에서 1950년대 초에 태어난 미국의 젊은 엘리트층-옮긴이) 시대를 두루 거친다. 여느 미국인들처럼 그도 텔레비전과 늘어나는 소비 욕구에 사로잡히고, 섹스가 점점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토끼는 농구에서와 같은 '커다란 돌파구'를 여전히 섹스에서 찾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또 하나의 욕망이 그의 발목을 잡는다. 토끼는 너무 많이 먹어서 결국 100킬로그램을 넘어서게 되는 것이다.
--- pp 195~197
이 책을 읽어나가는 데 가장 큰 어려움은 이름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 남성들은 거의 모두 '호세 아르카디오'이거나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이다. 후자의 이름을 가진 인물만 해도 열일곱 명 정도나 된다. 따라서 독서를 하는 사이에 그러한 인물들을 서로 구분하는 것을 아예 포기하게 된다. 게다가 그 가운데 많은 인물은 쌍둥이여서, 소설 속의 주변인들까지도 혼동한다. 이를 테면 한 여성이 그러한데, "동시에 두 남자와 번갈아 가며 잠을 자면서 그녀는, 마치 서로 다른 두 사람인 것처럼 사랑을 하는 한 남자를 갖게 되는 행복을 하느님이 자신에게 선물해 주신 거라고 생각했다."
마르케스는 오래 숙고할 필요 없이 쉽게 그러한 착상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 자신이 열여섯 명이나 되는 남매 가운데 장남이었기 때문이다. 기이한 인물들과 불가사의한 사건들이 많이 등장하는 이 소설에 대한 영감도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이냐는 질문을 받고서 그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나는 흙을 먹는 여동생, 미래를 점치는 할머니, 그리고 행복과 광기를 크게 구별하지 않는 같은 이름의 여러 친척들과 함께 우울한 대가족 집안에서 보낸 내 유년 세계를 문학으로 증언하고 싶었습니다."
--- pp 220
마거릿 미첼은 1900년 11월 8일 미국 애틀랜타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변호사이자 애틀랜타 역사학회 회장이었다. 미첼은 어린 시절부터 미국 남부의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열 살 때부터 그녀는 짧은 글과 희곡 소품을 써서 부모님에게 들려주고 연기를 해보이기도 했다. 애틀랜타에서 여학교를 졸업하고 매사추세츠 주 노샘프턴 대학교를 졸업한 후 1922~1926년에는 <애틀랜타 저널>지 기자로 활동했다. 이어서 그녀의 유일한 장편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쓰기 시작하면서 방대한 규모의 자료 조사를 병행해 나갔다. 미첼은 가족의 기억을 재료로 삼아 글을 썼는데, 몇 세대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야기는 조지아 주의 역사와 긴밀한 관계가 있었다. 집필 후 10년 만에 탈고되어 1036년 여름에 출판되자마자 이 책은 단숨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그때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이 여성 작가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이 책은 불과 반년 만에 100만 부가 팔렸고, 마거릿 미첼은 1937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데이비드 O. 셀즈닉이 영화판권을 사들이면서 시작된 영화화 작업은 3년 반 만에 완성되어, 1939년 말 애틀랜타의 그랜드 극장에서 이 기념비적인 웅장한 영화가 개봉되었다.
각본을 쓴 사람으 시드니 하워드로 기록되어 있지만 그 뒤에는 실제로 열두 명의 작가가 숨어 있었는데, 그 가운데는 특히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와 벤 헤히트도 포함되어 있었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전시대를 통틀어 가장 성공한 영화 순위에서 30년이 넘게 1위를 고수했다. 이 유일한 장편을 발표한 뒤로 마거릿 미첼은 편지 쓰는 일 말고는 더 이상 창작을 하지 않았다. ㄱ녀는 편지 쓰는 일을 아주 좋아해서 수천 통이 넘는 독자편지에 일일이 답장을 해주었다. 미첼은 남편인 존 마시와 오빠 스티븐 미첼의 권유로 그녀 자신의 사적인 글 대부분, 자신이 띄운 편지 사본과 받은 편지 및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초고 및 자료를 불태웠다. 1949년 8월 16일 자동차 사고로 숨진 마거릿 미첼은 애틀랜타의 오클랜드 묘지에 안장되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외에 출판된 미첼의 작품으로는 단편 <사라진 섬 레이즌>이 있는데, 이 작품은 남태평양의 한 섬으 무대로 펼쳐지는 사랑 이야기다. 1991년에는 마거릿 미첼 상속인들의 허락 아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후속작이 <스칼렛>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는데, 이 책을 쓴 사람은 1934년에 출생한 미국 여성 작가 알렉산드라 리플리였다.
--- pp 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