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순이는 뭘 하구 있을까? 무슨 빠엔가 찻집에 있다는 소문이 정말이라면 그건 명순이처럼 곧 남편이 좋아지지 않은 죄고, 음악이 취미라고 해서 축음기판을 무수히 사들이고 오켄지 뭔지 하는 데서 가수들이 오는 날이면 숱한 돈을 요리값으로 없애곤 하던 그 남편을 끝내 싫어한 죄일까?’
---「결별」중에서
“순재야, 너 오래 살구 싶니?”
삼희는 순재에게 말을 건넸다.
고, 강가무레하니 예쁜 눈을 아래로 내리뜨고는, 풀잎으로다 무엇인지 손장난을 치고 있는, 순재가 삼희는 무척 아름다워 보였다. 그래서, 오래 살면서 이러한 밤을 맞아주어야 할 사람 같은, 우스운 생각이 들기도 해서, 물어본 말이었는데,
“오래 살구 싶지 않어.”
하고, 정갈하게 웃으며 순재는 삼희를 보았다.
삼희는 어쩐지 쓸쓸하였다.
---「체향초」중에서
“쓸쓸하니 말이지...... 사랑하기만 하면 백년 천년 보지 않아도 된다는 건 거짓말이었어요.”
하고 잠깐 말을 끊었다가는 다시
“참는단 건 자랑이 있는 사람의 일일 게고, 또 자랑이 없는 사람은 외로워서 쓸쓸할 게고 그 쓸쓸한 걸 이겨나갈 힘도 없을 게고...... 그러니까 결국 아까 말한 그런 약점이란 어리석은 여자에겐 운명처럼 두려운 것이에요.”
---「가을」중에서
철재와 원의 감정은 그 시초부터 결코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었다. 단지 죽는다는, 혹은 죽을 사람이라는, 이 커다란 사태 앞에, 두 사람은 조금도 옆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던 것뿐이고,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밖에 표현되지 못한 것뿐이었다. 이것은, 앓는 사람의 병이 점점 차도가 있어감에 따라, 반대로 차차 멀어지는 두 사람의 관계를 보아 잘 알 수가 있었다. 요컨대 이것은 ‘산다’는 데서, 비로소 ‘죽는다’는 사실 앞에 양보한 ‘자기’들을 각기 찾으려는, 어떤 잠재한 의식의 표현 같기도 했다.
---「종매」중에서
제이는 인종차별에 대해 개탄하며 인종차별을 하고 있었다. 영애가 중국인이라는 사실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제이는 영애를 채용하는 데에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카페에서는 표준말을 사용하지 말 것. 연변 말로 서빙을 하라는 것이었다.
“한번 들려주실래요?”
“고조 잘 부탁드립네다.”
영애가 사용한 것은 연변 말이 아닌 평안도 말이었다. 북한군이 나오는 드라마에서 본 것을 어설프게 따라 해본 것뿐이었다. 제이는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중국인과 한국인도 구별 못하는 백인처럼.
---「제법 엄숙한 얼굴」중에서
어쩌면 제이가 정말로 외로운 것일지도 모른다고 영애는 생각했다. 아프다는 꾀병을 믿어버린 나머지 정말로 아프게 된 사람처럼. (...) 이상하게도 제이의 고독은 영애에게 희망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영애가 그동안 속으로 쌔쓰개라고 되뇌었던 수많은 사람, 영애가 들어야만 했던 가벼운 자랑과 가벼운 모욕들. 그 가벼움이 그들의 고독이라면. 그들이 허우적대고 있는 늪이라면.
---「제법 엄숙한 얼굴」중에서
그럼에도 임화 시인과 관련된 이야기로 이 글을 시작한 것은, 지하련 작가가 ‘그늘’에 가려져 있던 시간까지 내가 기억해야 마땅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한 명의 작가가 그늘에 가려진다는 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글을 읽지 못하는 독자에게도 그늘은 함께 드리워진다.
---「약간의 다름과 미묘한 같음」중에서
임솔아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얼굴에서 우리는 앞서 읽은 네 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얼굴을 다시 조우하게 된다. 1940년대에 쓰인 얼굴들에 비하면 훨씬 복잡한 맥락과 그럴듯한 명분이 있지만 맥락과 명분 아래에는 80년 동안 더 교묘해진 얼굴이 숨겨져 있다. (...) 사랑 없는 이념은 공허하고 이념 없는 사랑은 부박하다. 쉽게 공허해지고 그보다 쉽게 부박해지는 것이 인간의 삶일진대, 사랑이 동반된 이념을 실천하고 이념을 잊지 않은 채 사랑하기 위해 지하련은 우리에게 “가장 독립한 인간”이 될 것을 요청한다. 그에게 가장 독립한 인간이란 스스로가 허락하지 않으면 결코 타협하지 않는 인간이었다. 사랑에 있어서도, 사람에 있어서도.
---「가장 깊은 사랑, 가장 깊은 사람(해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