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9 - Life's Like’ 中
매일 붙어 다녔던 친구 스태프는 그리스와 스페인계 혼혈이었다. 스태프의 방에는 투팍과 비기, 퍼프 대디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스태프는 이게 진짜 힙합이라고 했다. 임성빈도 음악이라면 누구보다 많이 들었다고 자부했었다. 한국에 있을 땐 특히 듀스를 좋아했다. 엄마가 자주 듣는 셀린 디온의 노래도 즐겼다. 그날부터 임성빈은 워크맨에 쿨리오의 테이프를 넣고 다녔다. ‘C U When You Get There’가 들어 있는 싱글 앨범을 닳도록 들었다. 학교도 좋고 친구도 좋고 음악도 좋았다. 뉴질랜드가 너무 좋아서 거기서 평생 살고 싶었다.--- p.49
인터넷 힙합 동호회 정모에도 나갔다. 대학생 형과 누나들은 어리지만 퍽 카리스마가 있던 임성빈을 예뻐했다. 형들이 랩하는 걸 보면서 ‘내가 하면 더 잘할 수 있을 텐데…’ 싶었다. 옷 잘 입는 누나들과 클럽에도 같이 갔다. 신촌의 ‘블루몽키스’에서 프리스타일 랩을 구경하고, 크리스마스엔 래퍼 주석이 여는 파티에 갔다. 중학생이었지만 주민등록증을 보여 달라는 사람은 없었다.--- p.50
그림을 좋아했지만 입시 미술은 괴로웠다. 고2 때는 영화 [주먹이 운다]를 보고 류승범에 반해 연극영화과 진학을 꿈꾸기도 했다. 양동근처럼 랩하는 배우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부모님을 설득해 연기 학원에 갔지만 엔터테이너로서의 끼와 래퍼의 끼가 다름을 느꼈다. 3개월 만에 미술로 돌아와 재수를 했다. ‘대학만 가봐라, 난 음악만 할 거야.’ 입시만 끝나면 내 세상이 열릴 것 같았다.--- p.54
재즈 힙합을 좋아했던 빈지노는 재즈 힙합의 우울한 이미지를 깨는 한편 언더그라운드 힙합이 결코 촌스럽지 않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다. 2010년 10월 둘은 집에서 150만 원씩 빌려 300만 원으로 재지팩트 1집 [Lifes Like]를 발매했다. 스물 넷 예술가의 영young한 느낌을 일상적이면서도 내밀한 가사로 풀어냈다.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음악이 어떤 건지, 유행이 무엇인지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음악깨나 듣는다는 이들 사이에서 빈지노의 이름이 회자되기 시작했다. ‘서울대 출신 훈남 래퍼’라는 수식어가 입소문을 부추겼다.--- p.59p
석촌동 원룸을 벗어나 한남동 고급 빌라로 이사하는 데는 2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처음 큰돈을 만졌을 땐 원 없이 쇼핑을 했다. 솔로 앨범이 성공하면서 몸값은 하루가 다르게 뛰었다. SNS엔 그의 일상 사진을 모은 ‘남친짤’이 돌아다니고, 전국의 대학 축제를 돌며 ‘Aqua Man’을 불렀다. 패션, 헤어스타일, 트위터 멘션 하나까지 뉴스가 되었다. 모델 못지않게 많은 화보를 찍고, 패션쇼 런웨이를 걸으며 랩을 했다. 티브이 출연도 없었고, 대중적인 노래를 내놓은 적도 없었다. 한국 힙합 씬에서 유례없는 랩 스타의 탄생이었다.--- p.62
- ‘BEENZINO - Close To You’ 中
“쌈디 형 따라서 부산 어디 공연장에 놀러 갔는데, 다 같이 밥을 먹는 자리에서 버벌진트 형이 제 맞은편에 앉았어요. 쌈디 형이 제가 좋아하는 걸 아니까 가깝게 앉혀 준 거예요. 비빔밥을 막 비비는데 옥수수 한 알이 떨어졌어요. 버벌진트 형이 하필이면 조리를 신고 있었는데 새끼발가락 사이에 옥수수가. 하하하하. 그래서 엄청 벌벌 떨었어요. 형이 발가락을 꼼지락꼼지락하더라고요.”--- p.84
“팬들이 기대하니까 그들이 좋아할 만한 음악을 해야 한다, 그런 건 없어요. 저는 마니아들을 싫어해요. 너무 틀에 박혀 있어서. 저는 한 가지를 엄청 좋아하거나 파고드는 성격이 아니에요. 물론 예전엔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어요. 그땐 말도 안 통하고, 내가 최고라는 생각에 친구들과 싸웠던 기억도 있고. 그때의 내가 정말 별로라고 생각해요. 점점 더 다양한 게 좋아요. 빡빡한 마인드에 대화가 안 되는 사람들은 진짜 싫어요.”--- p.84
“저는 힙합에 목매지 않는 사람으로서 다른 래퍼들의 앨범 아트워크를 봤을 때 마음에 드는 게 없었어요. 난 죽어도 저렇게는 하지 말아야지, 뭘 하더라도 내 색깔이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어요. 개코 형이 다이나믹 듀오 앨범 커버를 디자인했다는 얘길 듣고 그걸 보기도 했는데, 전 그럴 용기는 안 나더라고요. 왜냐하면 내가 하면 앨범을 못 낼 수도 있겠다는 판단이 일찌감치 섰거든요. 하하. 그래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맡긴 거죠.”--- p.87
“다른 힙합 가수들이 예능, 토크쇼에 나가서 이슈를 일으킬 때 저는 그런 방식으로 유명해지고 싶지는 않았어요. 차라리 인스타그램을 열심히 하면 했지. [라디오 스타]도 거절했던 이유가 ‘힙합 특집’ 이런 걸로 같이 묶이는 걸 되게 싫어하거든요. 계속 그렇게 다른 길을 갔던 게 저의 힘이고, 아무래도 음악이 좋다 보니까 사람들이 듣게 된 것 같아요.”--- p.90
- 'Playlist' 中
요즘 꽂혀 있는 노래는 이상은의 ‘비밀의 화원’이다. 최근에 후배를 졸라 생일 선물로 앨범을 받기도 했다. 목소리와 감성, 음악도 물론 좋지만 그녀가 걸어가는 삶의 행보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꾸준히 하고 싶은 것을 찾아 떠나는 그녀의 라이프 스타일을 보며 빈지노는 큰 용기와 위안을 얻는다. --- p.135
- ‘Lyrics - Always Awake’ - 中
모두가 숨죽인 밤, 세상의 기운이 가장 약해졌을 때 빈지노는 맥북의 키보드를 두드린다. 음악이 없이는 감정이 올라오지 않아 글을 쓸 수 없다. 비트를 듣고 분위기에 맞는 플로우를 구상한 뒤 ‘외계어’로 먼저 랩을 뱉는다. 가이드 녹음은 따로 하지 않는다. 가사를 쓸 때 제약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대략적인 플로우 스케치가 끝나면 이에 맞춰 문장을 채워 나간다.--- p.139
빈지노의 가사 중 탁월한 은유와 재치가 돋보이는 ‘아쿠아 맨’도 주제를 잡기까지 며칠간 머리를 싸맸다. [24:26] 앨범 중 가장 마지막으로 작업한 노래다. 프로듀서 진보의 비트가 마음에 들었고, 여자와 관련된 귀여운 느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카페에 앉아 책을 뒤적이기도 하고, 여러 사람들에게 괜히 문자를 보내기도 했다. 그렇게 느낌을 잡아 가다가 집에 오는 길에 ‘어장 관리’라는 키워드가 머리를 스쳤다. 그날 밤 가사를 완성했다.
--- p.1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