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
-- 이상구(flypaper@yes24.com)
TV 코미디 프로그램중에 <역사 뉴스>라는 게 있다. ‘근엄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조선시대에도 오늘날과 같은 천태만상이 존재했더라’ 하는 것을 기본 컨셉으로 진행되는 이 프로는, 코미디 프로의 특성상 다소 과장되게 희화화되긴 했어도, 상투 틀고 도포 잎은 조선시대 사람들 또한 현대인들처럼 부동산 투기니 원조교제니 사채놀이니 등을 일삼는 지극히 평범한 무뢰배들이었다는 상식 아닌 상식을 일러준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 조선에 대한 여지없는 오해는 도처에서 발견된다. 시인 김수영은 ‘이사벨 버드 비숍여사와의 연애(?)’를 통해 “심야에는 여자는 사라지고 남자가 다시 오입을 하러 활보하고 나선다는 이런 기이한 관습을 가진 나라를 세계 다른 곳에서는 본 일이 없다고” 조선시대를 증언하기도 했다.
『조선의 뒷골목 풍경』은 『조선 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나오다』를 통해 “꼼꼼한 고증을 바탕으로 풍속사의 새로운 전형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은 바 있는 강명관 교수의 ‘조선풍속기행’ 두 번째 이야기다. 전작이 ‘혜원의 그림’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조선시대 사람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고증했다면, 『조선의 뒷골목 풍경』은 도박꾼, 탕자, 폭력조직, 벼락출세한 졸부, 도적 등의 조선의 뒷골목을 누빈 무명씨들의 떠들썩한 일상을 통해 조선시대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려낸다.
“나는 이런 방면의 시시한 주제는 누구나 다 아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쑥스러워 물어볼 수가 없었다. 뭔가 거창하고 큰 이야기를 논하는 근엄한 역사가들에게 깡패며 기생이며 도박 술집 따위에 대해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이곳 저곳에 물어보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어인 일인가. 뜻밖에도 내가 묻는 한심한 주제에 대해 아는 분들이 별로 없었다. 목마른 자 우물을 판다고 했다. 나는 스스로의 궁금증 때문에 문헌을 보다가 필요한 자료가 있으면 눈여겨보고 챙겨두곤 하였다. 지난해 병으로 얻은 휴가 아닌 휴가에 한 편의 글이 될 만한 것들을 수습하여 엮은 결과가 이 책이다.”
호기심 많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저자는 서울 시내 한 복판의 싸구려 술집에 앉아 소주를 입에 털어넣다 문득, 조선시대에도 이곳에 술집이 있었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에 빠져 들기도 했다. 성매매에 관한 뉴스를 보다가 남녀상열지사라고 했던 조선시대의 성의식과 성적 행동 등에 대한 궁금증이 밀려오고, 사기도박으로 잡힌 도박꾼들의 모습을 뉴스에서 보니, 조선시대 투전의 역사가 지금도 계속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놀라움을 느꼈다고 한다. 좋게 말하면 투철한 ‘프로의식’이고 완곡하게 가지 쳐 말하면 ‘뭐 눈엔 뭐만 보이랴’겠지만, 저자의 시시하고 자질구레한 것들에 대한 이 같은 애정 어린 호기심은 누구도 관심 갖지 않았던 조선시대의 뒷골목 혹은 거대담론에 가려진 일상의 리얼리티에 대한 놀랍도록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한다.
저자가 말문을 여는 사례는 우선 ‘금속활자’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로 외우고 있는 금속활자의 ‘최초성’, 그로 인한 한민족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표징이라는 사실에 저자는 의문을 표한다. 쉽게 마모되지 않는 금속으로 활자를 만들었지만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물이라는 <고금상정예문>은 여전히 수작업에 의지한 조판, 인쇄 작업의 결과 불과 28부를 찍었을 뿐이라는 사실이 그러하다. 반면에 구텐베르크 활자는 압착기를 이용해서 대량인쇄를 가능케 했다. 구텐베르크가 만든 금속활자는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지만, 우리의 금속활자는 13세기 초 발명된 이후 조선조가 종언을 고할 때까지 민간의 주된 인쇄 수단이 되지 못했다.
저자가 주장하는 바는 그러하다. ‘민족의 세계적 문화유산’이라는 명제로 인해 ‘민족’이란 어휘가 모든 것을 은폐해버렸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딜레마를 과감하게 깨기 위해 이 책 『조선의 뒷골목 풍경』을 들고 나온다. 저자는 한국사를 민족이란 코드로 읽고 그 장구한 시간을 민족이란 이름으로 뭉뚱그려 추상화시켜버린 결과, 양반/남성의 목소리에 가려져 버렸던 상놈과 노비와 여성의 목소리를 묻혀지고 말았다. 저자는 ‘민족’과 공존했던 ‘근대’와 ‘민중’의 모습 역시 제 옷을 입혀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시인 김수영이 그의 시「거대한 뿌리」에서 집중적으로 편애했던 “요강, 망건, 장죽, 종묘,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등의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의 손을 거침없이 들어준다.
술과 도박에 쩔어 살던 탕자, 요즘이나 조선시대 당시나 제일 못난 사내임이 분명한 유흥가의 기둥서방 짓을 하던 왈자, 보란 듯이 제대로 살 줄 모르는 것은 이제나 저제나 매한가지인 투전판의 도박꾼 등 어디 감히 책에 제 목소리를 내랴 싶었던 비주류 인생들이 이 책에서는 너도 나도 주인공 역할에 떳떳하며, 그치들에 대한 저자의 애정 또한 따뜻하기 비할 데가 없다.
반면에 근엄과 엄숙으로 헛기침하던 양반과 주류사회에 대한 칼대기는 냉정하기 그지없다. 가짜들에 대한 허상은 낱낱이 파헤쳐지고,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은 부조리와 위선은 아찔할 만큼 거하게 드러난다. 그 과정에서 길게는 500년 전, 짧게는 100년 전 민초들의 삶이 역사라는 허울 좋은 미명을 걷어내고 오늘의 현실을 다시 짚어보는 반성의 무대로 걸어 나온다. 조선의 뒷골목을 주름잡았던 무명씨들의 좌충우돌을 이 한권의 책으로 유쾌하게 갈무리하자꾸나, 놀랄 노짜더냐, 나도 놀랄 노짜다,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