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미륵사. 봉황면 덕룡산 중턱에 있다. 아름다운 마을 철천리 외곽이다. 가파른 경사를 따라 들어선지라 계단을 한참 올라가야 절에 들어갈 수 있다. 눈앞을 가로막은 돌계단이 아득해 보이지만 한 발 한 발 오르다보니 금새 절 마당이다. 544년 백제시대에 창건된 미륵사는 대웅전, 관음전, 삼성각, 설법전, 요사채로 이루어진 작고 아담한 절이다. 절 앞에 일렬로 늘어선 거대한 부도들이 눈길을 끈다. 납골묘다. 미륵사가 들어선 터는 봉황이 알을 품고 용이 여의주를 문 형상의 명당이다. 미륵사에는 보물이 두 점 있다. ‘보물 461호 마애칠불상’과 ‘462호 석조여래입상’이다. 고려시대의 작품들이다.
--- p.30, 「백제시대의 절에서 만난 고려시대의 석불」 중에서
어릴 적 추억을 상기하는 토끼풀꽃, 무성하게 자란 풀, 넓고 푸른 잎사귀들, 새소리…. 코스를 따라 정원 뒷문 쪽 가장 높은 데까지 갔다가 유턴. 대나무숲 사잇길을 따라 내려가면 온통 노랑색으로 점철된 창포밭이 나무들 사이로 보인다. 범선 돛대 감시탑처럼 연못가에 설치된 관망포인트에 선다. 어른 키 넘게 자란 파초숲 오른쪽으로 황홀한 광경이 펼쳐진다. 노랑창포꽃천지. “와아아~” 감탄사가 저절로 터진다. 창포꽃밭 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 걷는다. 오른쪽 직사각형 연못에 버드나무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 뒤로, 옆으로, 앞으로, 온통 노랑노랑한 창포꽃벌판. 황홀경. 박 화백이 창조한 지상 낙원이다. 옛날 클로드 모네의 정원을 방문했을 때 받은 감동이 자기만의 한국식 정원을 만들고 말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했단다. 클로드 모네의 일본식 정원은 못 가봤지만 글쎄 죽설헌보다 아름다울까.
--- p.42~43, 「나주의 숨은 보석 죽설헌 노랑창포꽃밭의 황홀」 중에서
마루 위 벽 높이 삼봉이 쓴 시 두 수를 새긴 현판이 걸려 있다.
“이엉 끝을 아니 잘라 처마는 어지럽고 / 흙을 쌓아 만든 뜰은 모양새가 삐뚤빼뚤 / 사는 새 지혜로워 제 머무를 곳 찾아오고 / 들사람 놀라서 뉘 집이냐 물어보네 / 맑은 시내 조용히 문을 지나 흐르고 / 영롱한 푸른 숲은 집을 막아 가렸네 / 밖에 나가 보는 강산 아득한 벽지인데 / 문 닫고 돌아오면 옛 생활 그대로네”
마루에 앉아 눈부신 햇살이 내리쬐는 들판을 바라본다. 반듯하게 경지정리가 된 논은 삼봉 시대의 것과 전혀 다를 것이나 바라보이는 풍경은 그대로일 것이다. 눈을 감으니 시공을 넘어 삼봉과 함께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다. 멀리 첩첩한 산들. 가까이 모내기를 기다리는 물댄 논. 모든 것이 정지화면인 풍경 속에 홀로 움직이는 것이 있다. 모판을 떠서 싣고 가는 트랙터다.
--- p.100, 「삼봉 정도전 유배지를 가다」 중에서
약전 약용 형제가 다시는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는 먼 길을 떠나며 울음을 터뜨린 율정점. 복원까지는 멀다 해도 표지판 하나 서 있지 않다. 주막집을 짓고 따뜻한 봉놋방을 들어 앉혀 여행객들을 불러들이고, 두 형제와 그들이 살았던 시대에 관해 이야기 하고 배울 수 있도록 하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을까. 문득 한참 전에 후배로부터 들은 말이 생각난다.
“나주에 율정점을 재현해 만들어 놓은 곳이 있습니다.”
부슬비 속을 조심스레 운전해 나주읍성의 서쪽 대문으로 간다. 서성문 앞에 초가집 두 채가 있다. 하나는 관광정보안내소, 하나는 음식점이다. 당연히 술과 음식을 파는 초가가 율정점일 것이다. 초가의 모습에 다소 실망한다. 율정점이어야 할 주막집의 이름은 서문주막이다. 초가와 어울리지 않는 전광판에 글자들이 흐른다.
--- p.153, 「약전과 약용 형제, 나주 율정점에서 이별하다」 중에서
우습제. 13만여 평의 광대한 못에 핑크색 연꽃이 가득 피어 있다. 장관이다. 저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연못 위로 나무 데크가 설치돼 있다. 데크 위를 걸어 안쪽으로 들어간다. 흙길이다. 푹신푹신 발에 느껴지는 감촉이 보드랍다. 왼쪽으로 홍련이 만발한 연못을 끼고 걷는다. 우습제는 다른 이름으로 ‘소소리방죽’이라고도 한다. 제방에 소를 매어 놓은 데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음메 음메 하고 소가 소리를 내던 방죽이라는 뜻인가. 나 말고 산책하는 사람은 없다. 새소리, 매미소리, 바람소리 속을 걷는다. 소 울음 소리는 없다. 십삼만 평 연못을 나 혼자 전세 냈다. 칸나, 백일홍, 분홍 연꽃이 피어있다. 불현듯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어떤 냄새, 소리, 풍경에 조우했을 때 불현듯 유년의 추억들이 소환되는 경험. 모두들 있을 것이다.
--- p.244, 「공산면 생태공원 우습제」 중에서
머리고기, 양지, 사태, 목심을 넣고 푹 삶아 고아낸 맑은 물에 밥을 말아서 가져온다. 밥을 국에 그냥 만 것이 아니라 토렴한 것이다. 토렴은 찬밥에 국물을 부었다가 따르고 다시 붓는 일을 되풀이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밥알마다 국물이 스며들어 맛이 진해지고 탱글탱글해진단다.
맑은 국물을 한 숟갈 떠 입안에 넣는다. 따뜻한 국물이 식도를 타고 위를 거쳐 아랫배까지 내려간다. 추위에 움츠러들었던 몸이 스르르 풀어진다. 숟가락 가득 고기와 밥을 담고 익은 김치 한 조각을 얹는다. 아무렴, 곰탕은 이렇게 먹어야 제 맛이지. 기자 출신 고재열 여행감독은 겨울에 먹은 나주곰탕을 인생의 소울푸드라 했다.
--- p.250, 「추운 겨울, 나주곰탕만한 게 있으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