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이란 모든 문화와 사회적 상황을 실체화하는 거울이다. 그런 만큼 디자인 담론 패러다임은 항상 변화하기 마련이며, 그렇기에 포스트모더니즘 이래로도 계속 변해왔다. 확장된 세계화 시대인 오늘날, 제품의 유용성과 내구성의 역할은 예전보다 훨씬 더 커졌다. 한편으로는 세상의 자원이 한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소비 과정에 참여하는 이들의 수가 끊임없이 늘어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내게 디자인은 사치품을 사도록 자극하는 술책이 아니라 복잡하고 어수선하면서도 매혹적이며 개방된 세상에서 지향점과 태도를 담은 체계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 핵심은 이 세상을 모든 사람이 살아갈 가치가 있는 내일을 맞이할 수 있는 장소로 만들어가는 방법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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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의 말에 따르면 브라운은 세 가지 원칙, 즉 질서의 원칙, 조화의 원칙, 경제성의 원칙으로 정의된다. 이는 절대적으로 정확하고 오늘날에도 적용되는 분석이다. 다만 리처드 모스는 넌지시 내비쳤을 뿐이나 내가 보기에 매우 중요한 점을 하나 짚자면, 브라운 디자인의 질서와 조화 및 경제성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디자인 유형’의 구성 요소였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이 원칙들은 기능적이고 사용자 친화적인 제품을 디자인하겠다는 훨씬 깊은 의도의 결과물로서 생겨난 것이다. 레코드플레이어든 주방기기든, 슬라이드 프로젝터든 면도기든 디자인이 무질서하거나 뒤죽박죽이거나 혼란스럽거나 과한 제품은 제 기능을 다할 수 없다. 디자인의 조화로움, 즉 심미성 또한 제품과 사용자 사이에 바람직한 정서적 관계를 형성한다는 기능적 목적이 있다. 리처드 모스의 글에 이어 나는 브라운 디자인에 영향을 미친 네 번째 ‘원칙’, 즉 지속성을 덧붙이고 싶다. 필수적 기능 측면에 집중하고, 질서와 조화에 신경을 쓰고, 부수적이고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면 극도로 간결한 제품 디자인에 도달하기 마련이다. 이런 디자인은 모든 유행을 넘어 존재하며 본질을 돋보이게 한다. 그렇기에 수많은 브라운 가전이 전체 디자인에 별다른 변화 없이 수십 년간 생산 및 판매되는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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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운 라이터의 디자인은 ‘최소한 그러나 더 나은’ 원칙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기본 형태는 원기둥, 납작한 직육면체, 정육면체였다. 라이터를 만들면서 우리는 아주 단순하면서도 정교함과 섬세한 마감에서 가치를 느낄 수 있는, 마치 작은 조각 작품 같은 개인용품을 디자인하려 시도했다. 라이터는 손에 쥐고, 불을 켜고, 들여다보고, 주머니에 넣을 때 기분 좋은 것이어야 했다. 라이터 디자인 작업은 항상 내게 즐거운 일이었다. 원통형이라 ‘실린드릭’으로 불린 탁상용 라이터 T 2는 내가 브라운에서 디자인한 첫 라이터였다. 점화 장치는 당시 꽤 혁신적이었던 자석식으로, 버튼을 누르면 불꽃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전하가 생성되는 방식이었다. 이 장치의 작동엔 어느 정도의 힘이 요구되었기에 버튼은 원통 옆면 일부를 도려낸 모양으로 디자인되었고, 라이터를 손에 쥐었을 때 엄지손가락 전체로 힘주어 누르기 딱 좋은 자리에 특별히 큼직하게 배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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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운 디자이너들의 주요 업무는 제품의 포괄적 디자인, 즉 제품 자체와 거기 딸린 모든 요소를 디자인하는 것이다. 디자이너는 제품의 기본 형태, 크기와 비율, 조작 요소의 배치, 외관 구조 설계, 색상뿐 아니라 제품에 들어가는 모든 글자와 기호를 포함하는 제품 그래픽까지 하나하나 정한다. 포장 상자, 카세트, 액세서리, 청소 도구 등 제품에 속하는 모든 요소 또한 디자인 부서에서 디자인된다. 디자이너들은 제품 소재 선정 과정에도 똑같이 깊이 관여하는데, 오늘날 이는 환경보호라는 관점에서 그 중요성이 점점 커지는 요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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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히 말하자면 건축가로서 공부하고 일하는 동안 나는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채우는 디자인을 접하게 되었다. 그런 것들은 내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나만의 디자인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의욕을 불러일으켰다. 때마침 나는 어떤 종류의 환경에서 어떻게 살고 싶은지에 대한 나만의 생각을 확립하는 인생 단계에 있었다. 그 당시, 아니 지금까지도 내가 스스로 디자인한 가구 시스템에 담긴 가치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단순함과 절제가 아닐까 한다. 시스템 책장에 책을 가득 꽂으면 책장 자체는 거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나는 “좋은 디자인은 최소한의 디자인이다”라는 다소 모순적인 문장으로 표현했던 마음가짐을 토대로 모든 가구를 디자인했다. 이 절제된 디자인의 목표는 나, 그리고 생각이 비슷했던 동료 디자이너들이 양산한다고 비난받았던 몰개성한 황량함이 절대 아니다. 우리 목표는 ‘물건’의 지배에서 벗어난 자유다. 내가 디자인하고 나아가 직접 누리고 싶었던 생활환경은 누구나 자기 자신에게 꼭 맞게 바꿀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 움직임이 있고 변화를 허용하는 여유가 제공되는 공간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전형적이거나 지나치게 가정적인 환경을 답답하고 거추장스럽게 느낀다. 우리를 둘러싼 가지각색의 물건, 부담스러울 정도의 다양성에는 뭔가 파괴적인 데가 있다. 언젠가 나는 군더더기를 전부 쳐내서 핵심이 두드러지게 하는 것이 내 목표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렇게 나온 형태는 차분하고, 기분 좋고, 이해하기 쉽고, 오래간다. 내가 디자인한 가구들의 긴 수명이 이 점을 설득력 있게 증명한다. 이들 선반과 탁자, 의자는 나이 먹는 종류의 모든 디자인을 단순성으로 뛰어넘고, 이는 시대적 유행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 p.134~138
제게 있어 디자인의 소임이란 윤리적 영역의 문제입니다. 좋은 디자인은 미덕이니까요. 우리가 세워야 할 더 좋은 세상은 반드시 도덕적 가치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져야 합니다. 이런 접근 방식은 세간에 널리 퍼져버린 관점, 즉 디자인을 일종의 가벼운 오락거리로 취급하는 태도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이 보편적 의견에 따르자면 제품은 물론 음악이나 건축, 광고, TV 프로그램 등 뭐가 됐든 모든 것은 그때그때 대상 소비자의 입맛에 맞게 만들어져야 합니다. 마음에 들기만 하면 좋다는 것입니다. ‘통하기만 하면 뭐든 괜찮다’라는 생각의 승리죠. 이건 가치 추구의 의무를 향한, 포스트모던 시대다운 냉소적 무관심에 가깝습니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많은 것이 설명됩니다. 어떤 대가를 치러서든 남과 달라지길 원하면서도 기능에 토대를 두고 발전한 모더니즘 미학을 비웃는다는 모순도 여기 포함되고요. 제 경험상 색다름 자체만을 위해 다르게 만든 물건은 더 나은 경우가 거의 없지만, 더 나은 물건은 거의 항상 색다르더군요.
--- p.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