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이 집을 관리하고 있는 조동길씨를 만났다. 객지에서 공무원 생활하다가 정년퇴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종택을 관리하고 있다. 말년을 의미 있게 회향하고 있는 것이다. 신미생이라고 하니까 올해 칠십의 연세이다. 꽉 다문 입과 약간 매서운 눈매, 그리고 깔끔한 차림새로 보아서 오행 중 금 체질에 속하는 관상이다. 대개 금 체질들은 맺고 끊는 것이 정확한 사무라이 기질이 많아서 이야기를 할 때에도 앞뒤가 분명하고 요점만 이야기하는 장점이 있다. 서론이 짧고 뼈대만 이야기하므로 인터뷰 상대로는 최적이다. 어디서 왔느냐고 묻길래 "전라도에서 왔다"고 하니까 다소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호은종택에는 370년 동안 내려온 가훈이 있습니다. 바로 삼불차라는 것이죠."
- 삼불차가 무슨 뜻입니까?
"세 가지를 불차한다. 즉 빌리지 않는다는 뜻이죠. 첫째는 재불차로 재물을 다른 사람에게서 빌리지 않고, 둘째는 인불차로 사람을 빌리지 않고, 셋째는 문불차로 문장을 빌리지 않는다는 말이죠. 이 삼불차가 호은 할아버지 때부터 현재까지 계속 지켜져왔습니다."
--- pp. 20~21
자처초연(自處超然) : 스스로 초연하게 지내고,
대인애연(對人靄然) : 남에게는 온화하게 대하며,
무사징연(無事澄然) : 일이 없을 때에는 맑게 지내며,
유사감연(有事敢然) : 유사시에는 용감하게 대처하고,
득의담연(得意淡然) : 뜻을 얻었을 때는 담담하게 행동하며,
실의태연(失意泰然) : 실의에 빠졌을 때에는 태연하게 행동하라.
--- p.128
안국동 8번지 고택. 원래 이 집은 지금으로부터 130년 전쯤인 구한말에 민씨성을 가진 대감이 지은 집이라고 한다. 인품이 훌륭해서 '민 부처'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장안의 유명한 도편수를 동원해서 99칸이 넘는 거대한 규모의 저택을 짓는다는 소문이 당시 임금인 고종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고종이 민 부처를 소환하여 "네가 대궐 만큼이나 큰 집을 짓는다고 하는데 반역할 의사가 있느냐"고 추궁했다. 이때 민부처의 답변이 걸작이다. "이 집은 부처가 살 집입니다."
부처가 살 집이라는 것은 불교 사찰을 의미하고 사찰이라면 당연히 크게 지을 수 있다는 말이다. 동시에 자신의 별명이 부처이니 자기가 살 집이라는 뜻도 된다. 이 재치 있는 임기응변에 고종도 파안대소하고 그냥 넘어갔다고 한다. 그후 일본에 망명했다가 귀국한 박영효 대감이 적당한 거처가 없다는 얘기를 들은 고종이 민 부처에게 박영효에게 집을 넘겨주라는 명령을 내려서 박영효가 얼마간 살았다고 한다.
담장 하나 사이로 바로 옆집은 '열하일기'와 '허생전'의 저자 연암 박지원과 연암의 손자로 개화파의 수장격이던 박규수가 살던 집인데, 우라 나라에 몇 그루밖에 없는 백송이 아직 그 터를 지키고 있다. 지금은 헌법 재판소로 바뀌었다.
개화기 역사를 보면 박영효는 갑신정변에 참여했다가 실패하자 1차 일본에 망명한 적이 있고, 그후 김홍집 내각의 대신으로 있으면서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하여 또다시 일본에 망명했다가 1907년에 귀국하여 용서를 받았다. 두번의 일본 망명과 귀국 등 여러 정황을 감안할 때, 박영효가 이 집에 살기 시작한 시기는 아마도 1차 망명에서 돌아온 1880년대 후반쯤이 아닐까 싶다. 김옥균이 박영효씨에게 써준 편액이 이 집에 남아 있으니 두 번째 망명 이후는 아닐 것 같다.
이후로 잠깐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의 소유가 되었다가 1910년대에 윤씨 집에서 이 집을 구입하였다 그 이후로 윤씨 집안이 계속 여기에 살아왔으며 현재까지 종가로 유지되고 있다.
--- pp. 121~122
부불삼대, 곧 '부자가 3대를 넘기기 힘들다'란 말이 있다. 최근 들어 우르르 무너지는 재벌들을 보면서 옛 어른들이 남긴 이 말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100년은 유지될 줄 알았던 한국의 재벌들이 허망하게 넘어지고 부도나는 광경을 목격하면서 부자가 3대를 넘긴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세간사의 이치를 깨닫고 있다. 이루는 것도 빠르지만 망하는 것도 신속하다. 삼천리를 내려가는 백두대간의 유장한 산줄기처럼 3대를 넘어 오래가는 부자가 어디 없단 말인가! 그 유장한 부자를 보고 싶다.
최 부잣집을 찾은 것은 그 유장한 부자, 졸부가 아닌 명부를 눈으로 보고 싶어서이다. 3대를 넘어가는 명부가를 보면서 길게 가는 삶의 경륜을 배우고 싶다. 한국에 명부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도 명부가 있다. 그 집이 바로 경주에 있는 최 부잣집이다.
최 부잣집은 9대 동안 진사를 지내고 12대 동안 만석을 한 집안으로 조선 팔도에 널리 알려진 집이다. 9대 진사, 12대 만석꾼의 집. 만석꾼이야 찾아보면 많지만 12대를 연이어 만석을 한 집안은 아마도 조선 팔도에 이 집뿐일 것이다. 이 기록은 앞으로도 좀처럼 깨기 어려운 전무후무한 기록일 성싶다. 3대도 어려운 건데 어떻게 12대를 이어갔단 말인가. 12대를 이어갈 수 있게 한 경륜과 철학이 반드시 있었을 텐데 그것이 과연 무엇인가? 이런 의문을 품으면서 나는 경주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 p. 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