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인의 눈빛을 자세히 뜯어보십시오. 이 앞에 누군가 남정네가 앉아 있는 것처럼 보입니까? 분명 여인이 옷을 벅시는 벗는 모습이지요. 옷을 입는 모양일수도 있다고요? 하지만 아래 치마끈 매듭이 풀려 느슨해진 것을 보십시오. 하루 일이 끝난 고단한 몸을 우선 치마끈 매듭부터 풀러 숨쉬게 해놓고 이제 막 저고리도 마저 벗으려는 것이 분명합니다. 옷고름을 풀때는 이렇게 한 손으로 노리개를 꼭 붙들고 끈을 끌러야 아래로 뚝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위에 남자가 없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고요? 남자는 커녕 아무도 없는게 분명합니다. 이 꿈 꾸는 듯한 눈매를 보세요! 이런 맑은 표정이 남 앞에서 나오겠습니까? 그러니까 제 생각에는 신윤복이 저 홀로 지극히 사모했던 기생을 그린 것 같습니다. 그것도 대단한 일류 기생을 말입니다. 아득하니 저 멀리 높이 있어서 도저히 제 품에 넣을 재간은 없고, 그렇다고 연정을 사그라뜨릴 수도 없으니까 이렇게 그림으로라도 옮겨 놓은 것 같아요. 기생이라고 하면 여러분, 흔히 요새 술이나 따르는 고만고만한 그런 여성을 생각하실지도 모르지만, 물론 조선시대라고 그런 기생이 없엇던 것은 아니지만, 그 기생이라는 게 사실 천차만별입니다. 가끔 국악 하셨던 분들께 "예전에 뭐하셨어요, 할머니?" 그렇게 물으면 "나 기생이었다"고 당당하게 얘기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 pp.205~206
과학자들도, 사물을 보는 것은 눈이지만 그 눈은 오직 우리의 마음 길이 가는 곳에만 신경을 집중할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눈이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이 본다고 말할 수 있지요. 그래서 옛 그림을 진짜로 잘 보려면 옛 사람의 마음으로 봐야 한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려진 작품도 마찬가지입니다. 화폭 속에는 여러 형상이 갖가지 모양으로 그려져 있지만, 요컨대 이 모든 것 또한 한 사람, 즉 화가의 마음이 자연과 인생에 대해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묘사해 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회화 가상이란 한 사람이 제 마음을 담아 그려 낸 그림을, 또 다른 한 사람의 마음으로 읽어내는 작업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참 어렵지 않습니까? 그것도 옛 사람의 마음이라니 원, 마음이란 것은 지금 마주 대하고 있는 앞사람의 속도 열 길 물속보다 알기가 어렵다는데 말이지요.
--- pp.82~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