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바심과 인내심은 그게 일종의 ‘심’이며 ‘자의식’이며 ‘합리화된 포즈’인 한에서 절대 무심과 자연을 이기지 못한다. 병실에 누워 오랜 시간 그 여인을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그 여인이 아름답게 보인다고 중얼거린 벤야민이나, 성마르게 귀를 곤두세우고 그 여인의 머리채를 기어코 휘어잡고 말겠다고 날뛰는 나나, 시골 식당 사람들보다 한 수 아래라는 면에서는 동급인 것이다. 신 앞에서 인간이 공평하듯, 언어 앞에서는 누구나 병자 또는 정신병자인 것이다. 이 말을 하기 위해 나는 죽어도 쓰기 싫은 작가의 말을 썼다.
당신이 이 책의 소설들을 어떻게 생각할지 벌써부터 조바심이 난다.
--- 작가의 말 중에서
먼 훗날 미지의 방문객이 조용히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장면을 상상한다. 그 방문객은 걷는 소리도, 말소리도 내지 않고, 유능한 기획자인 내가 뒤돌아보아주기만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다. 드디어 나는 고개를 돌린다. 문 앞에 누군가가 서 있다. 저는 소설을 쓰는 사람입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원고를 가져왔습니다. 나는 그 사람이 건네주는 원고를 유리그릇처럼 소중하게 받아안는다. 그렇게까지 조심하실 필요는…… 나는 턱을 살짝 치켜들고 고개를 천천히 가로젓는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소설가는 글에 향기를 불어넣을 줄 아니까요. --- pp.40-41
오 여사는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군데군데 검게 덩어리 진 숲은 썩은 이를 드러내고 씨익 웃는 늙은 사내 같았다. 문득 휴게소 관광버스에서 본 추잡한 장면이 떠올랐고, 부둥켜안고 쭉쭉거리던 늙은이 중 뚱뚱한 여자 쪽이 어쩐지 지금의 심 여사를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럴 리는 없었다. 등 뒤에서 밀려오는 오싹한 기운 때문에 오 여사는 무릎에 시큰한 통증을 느끼면서도 숲길을 내려오는 내내 잰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 p.84
“재미있었던 게 뭐냐 하면요, 사흘 내내 버스 타고 다니는데 사람들이 막 태워달라고 손 흔들고 그래서.”
그 말에 나는 발작을 하듯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이 그칠 만하면 버스 차창 밖으로 차를 태워달라고 손 흔드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 다시 웃음이 터졌다.
“나도 그 얘기 듣고 한참 웃었어요.”
도우가 흡족하게 말했다.
“아, 어떡해? 좀 태워주지.”
이렇게 말하는데 다시 웃음이 터졌다. 이렇게 오랫동안 열렬하게 웃는 게 아주 오랜만인 것 같았다. --- p.114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나만 혼자 이렇게 달라져 있다…… 그렇다. 도박을 하지도, 사치를 하지도 않았다. 로또를 바란 것도 아니었다. 그저 열심히 돈을 벌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단 한 번 잘못 돈 길모퉁이로 나는 내 인생과 은찬의 인생을 한 큐에 엿 먹이고 말았다. 어쩌면 상미의 인생까지도.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빚은 계속 불어나겠지만
내가 명백히 느끼고 있는 것처럼 내 삶은 점점 줄어들 것이다. 나는 아무도 믿지 못하고 누구와도 사귀지 못할 것이다. 남은 내 삶은 고시원의 방보다 좁아지고, 내가 앉아 있는 이발관 앞 평상보다 좁아지고, 내가 겨우 끌고 다니는 짐 꾸러미보다 작아지고, 마침내 지금 내가 들고 있는 앙상한 닭의 목뼈 같은 롯드만 하게 줄어들 것이다. 그건 살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 p.151
저 악마의 죄를 입증하기 위해서라면 그녀는 모든 고통을 달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화분을 내리쳐 여자애를 죽인 죄로 처벌받는 것도 기꺼이 감수할 생각이었다. 그러니 이제라도 손잡고 경찰에 자수하러 가든지 아니면 평생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자고, 그녀는 석호 새끼의 목줄을 바싹 잡아챌 작정이었다. 저 새끼는 분명히 싫다고 할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시간은 얼마든지 있었다. 혹시라도 저 양심 없는 새끼가 어느 순간 잠도 잘 퍼 자고 밥도 잘 처먹게 된다면, 그릇된 삶을 교정하여 갱생의 길로 이끄는 목자처럼 그녀가 나서서, 그가 한시도 마음 편히 살 수 없도록 그의 죄를 낱낱이 새록새록 일깨워줄 생각이었다. [……]
오, 주여! 은혜는 수난을 당하는 성녀(聖女)처럼 공포와 희열에 휩싸인 채 알몸을 달달 떨면서 거울 앞에서 두 손을 모았다. --- p.194
그녀는 고개를 돌려 두 남녀를 끝까지 지켜보았다. 이호재가 모퉁이를 돌았고 보이지 않는 끈에 묶인 듯 여학생이 그 뒤를 따라 모퉁이를 돌았다. 묶은 머리가 한 포기 상추처럼 까딱거리다 사라지는 걸 본 순간 그녀는 지독한 경멸과 쓰라린 그리움이 결합된,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달고 쓰고 시고 떫은, 아주 기묘하면서도 익숙한 감정이었다. --- p.228
그게 뭐 어때서,라고 생각하는 순간 증기처럼 아득한 두려움이 나를 덮친다.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잊음으로써 얼마나 많은 시간 토막들을 잃어버리고 살아왔을까. 진짜는 죄다 도둑맞고, 내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자아의 금고 속에는 엉뚱한 모조품만 잔뜩 쟁여져 있는 느낌이다. 스물두 살의 첫새벽처럼 나는 텅 빈 주방 앞에서 나지막이 읊조린다.
누가 너를 내게 보내주었지?
--- p.2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