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삼조 승찬대사(僧燦: ?~606):
처음 혜가대사를 찾아왔을 때는 나이 40세였다. 출가 이전의 기록은 없다. 그저 대중 가운데 머물며 묵묵할 뿐이었다.
어느 날 혜가대사가 물었다.
"어디에서 왔는가“
그가 입을 열려고 하지 않자 혜가대사는 다시 물었다.
"나에게 무슨 일로 왔는가."
승찬은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스님께 가르침을 청합니다.“
혜가대사가 다시 물었다.“
그대와 같은 중풍 환자가 나를 만난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승찬이 말했다.
“몸은 비록 허물어졌을지라도 이 마음만은 스님의 마음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물었다.
“저는 풍병이 걸렸사온데, 스님께서 죄를 참회케 하여 주십시오.”
“죄를 가지고 오너라. 참회시켜 주겠다.”
이에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죄를 찾아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대의 죄는 다 참회가 되었다. 앞으로는 불법승 삼보에 머물도록 하라.”
“지금 스님을 뵙고 승보를 알았습니다. 불보와 법보는 어떤 것입니까?”
“마음이 부처요, 마음이 법이다. 법과 부처는 둘이 아니요, 승보도 그러하다.”
“저는 오늘 비로소 죄의 성품이 안에도 밖에도 중간에도 있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이에 혜가대사는 기특하게 여기고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깎아주며 말했다.
“너는 나의 보배이다. 이제부터 승찬(僧璨)이라 부르라.”
이후에 병이 차츰 나아졌으며 2년간 혜가대사를 시봉하였다.
승찬(僧燦)이란 승보(僧寶)를 뜻한다. 뭇 스님들의 보배구슬이라는 말이다. .
당시는 위진남북조 시대로 혼란스러운 세상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바른 불법을 구하는 것보다는 이 한 몸을 구하는 것이 더 급하였다. 때문에 이 시대의 불교는 주술적이고 기복적인 풍조가 더 성행하였다.
승조대사 또한 2대 혜가조사로부터 법을 받고서 서주 완공산으로 몸을 피하였다. 다시 후주 무제의 불교 박해로 인하여 태호현 사공산으로 옮겼는데, 이후에 또다시 5호16국 시대의 혼란을 맞이하였다. 마침내 문제(文帝)가 천하를 평정하고 수나라(581년)를 세웠는데, 이로부터 20년 후에 13개 주에 명하여 사리친견법회(601년)를 열었다. 이때 비로소 대사는 산에서 밖으로 나왔다.
606년에 이르러 대중 가운데에서 사자후를 토하고서 말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좌선에 든 채로 죽는 것을 우러러보고 훌륭하다고 말한다. 그대들은 앉은 채로 죽는 것을 기이하게 여기겠지만, 나만은 생사를 자유자재로 한다. 나는 이제 선 채로 죽으려 한다. 나는 생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
그리고는 나무를 잡고 선 채로 그대로 입적하였다.
대사께서는 도신(道信)스님에게 법을 전하고, 오직 「신심명」 한 권을 남겼다.
염고
진헐 청요선사(?歇?了: 1088~1151):
남송시대의 선승으로 단하자순(丹霞子淳: 1066~1119)선사에게서 법을 받다. 조동종 14세 법손으로 보타산(普陀山) 불교선종(佛?禪宗)의 시조이다. 미목이 수려하였으며 태어나면서부터 혜안이 있었다. 어려서 부처의 상을 보고 문득 기뻐하였으며 11세에 성과사(聖果寺)로 가서 청준(?俊)대사를 의지하여 출가하였다. 18세에 「법화경」 시험을 보고서 스님이 되었다.
처음 단하선사를 참례하니, 선사가 물었다. “무엇이 공겁시절의 자기인가?” 여기에 대해 알지 못하였는데, 며칠 뒤에 발우봉(?盂峰)을 오르다가 확연히 깨닫게 되었다. 다음날 단하선사가 상당하여 말하기를, ‘해는 푸르른 고봉(孤峯)을 비추고 달은 차가운 계곡의 물에 임한다. 조사의 현묘한 비결을 촌심(寸心: 협소한 마음)에 두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이에 스님이 말하기를, ‘오늘 자리에 오르셨지만, 또다시 저를 속이지는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단하선사가 놀라워하고 기이하게 여기며 잠시 침묵하고서 말했다.
“장차 그대가 법의 땅(法地)을 얻게 되리라.”
훗날 진주의 장로산에 이르러 조조도화(祖照道和)선사를 참례하여 한 마디에 계합해 시자가 되게 하었는데, 뒤에 조조선사의 법석을 이어받았다. 당시 그를 따르는 대중이 1800인에 이르렀다. 이로부터 5년 뒤 1128년에 보타산에 이르러 보타사 뒷산에 암자를 짓고서 ‘해안고절처(海岸孤?處)’라고 현판을 걸었다. 이로써 보타산이 불국정토의 시초가 되었다. 이후에 칙명을 받들어 여러 절에서 주지하였으며, 자녕황태후(慈寧皇太後)의 명을 받들어 고영(?寧) 숭광사(崇光寺)를 창건하였다.
소흥21(1151)년 8월에 병의 조짐을 보였는데, 태후의 후원으로 수륙법회를 성대하게 열었다. 이에 선사는 임종게를 말하였다.
뿌리로 돌아감에 바람이 잎을 흔들고
비춤이 다함에 달이 깃든 못이 공하다.
歸根風隨葉 照盡月潭空
탑을 숭광사 서쪽에 안치하고 ‘성공선사(悟空禪師)’라는 시호를 얻었다.
저서로는 「화엄무진등기(華嚴無盡燈記)」가 있는데, 화엄사상을 선종에 융화하였다. 또한 「정토집(淨土集)」을 저술하여 선종과 교종, 정토종을 조화하고자 하였다. 선사에게서 법을 얻는 자는 11명이었으며, 제자들에 의해 「진헐청요선사어록(?歇?了禪師語錄)」이 편집되었다. 이 「신심명」은 그 가운데 실린 내용이다.
번역 및 찬술: 취산원장(翠山圓藏)
해인사로 출가하여 30년간 지관을 닦고 화두를 참구하다.
혜충국사의 무정설법을 참구하며 계곡을 따라 내려가다 문득 물소리를 듣고서 들어가는 문을 얻다. 그리하여 임제스님이 대우화상의 아랫배를 주먹으로 찌르고, 향엄스님이 기와조각이 대나무에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영운스님이 복사꽃을 보고, 아난존자가 베개를 더듬다 깨닫는 인연 등등 백천구절이 저절로 드러나게 되다.
이후 경전과 선어록을 널리 열람하다.
『벽암록』, 『금강경백가해』, 『육조단경』, 『선으로 가는 불교통론』, 『육조의 마음을 담은 수심결』, 『화엄법계관으로 본 반야심경』, 『실참실구로 이끄는 몽산법어』, 『돈오입도요문론』, 『전심법요』, 『화두100칙 염송집』, 『벽암록찬술』, 『마조록』, 『임제록』, 『조주록』 등을 번역하고 찬술하고 저술하다.
현재 충북단양에서 정혜쌍수(定慧雙修)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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