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서 가족은 철저하게 혈연주의적 배타성을 보이는 동시에 본질적으로는 계급적 차별화의 재생산 기제로 작동한다. '단란한 가족'이란 (남녀로 구성된) 부모가 모두 존재하고 아들딸의 비례가 맞는 가족의 특정한 유형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고아는 단란한 가족의 구성원들에 비해 사회적으로 열등한 개인으로 상정되며, '고아는 고아끼리'. '하인은 하인끼리' 가족을 이루어야 한다. 물론 작품에서 오목이와 수지, 수철은 모두 혈연적 차원에서는 고아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수지와 수철이는 경제적 힘이라는 '부모'를 갖추고 있으므로 정상적이고 단란한 가족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우리 사회의 가족주의의 표면을 이루는 혈연주의는 동질적 집단끼리의 배타적 권력에 대한 애착의 표현이다. 남아선호 사상 역시 대를 잇는다는 봉건적 인식뿐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남성성이라는 동질성을 중심으로 권력화되어 있는 - 따라서 여성성은 열등한 것이자 이질적인 것으로 배척되는 - 사회적 구조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의미에서 가족은 계급적 기구이며 구성원에게 최초의 계급적 지위를 선사하는 것이다.
--- 본문 중에서
따라서 한 사회의 파시즘화를 경계한다면 보수 이데올로그의 준동에 격분하기 전에 그 사회의 집단적 원한의 수위를 살펴야 할 것이다. '남성을 적으로 돌린 여성운동이 성취한 것이라고는 노후 대책없는 사회에서 불행한 이혼녀나 가난한 독신여성을 양산한 것이 고작'이라는 식의 페미니즘에 대한, 또는 여성의 권리 주장에 대한 반동적 담론들이 보여주는 바는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원한의 위험수위이다. 불행한 이혼녀, 가난한 독신녀, 사회적 경제적 무능력자라는 자책감과 사회에 대한 환멸만을 키워가는 고학력 실업자들, 착실하게 직장생활을 해도 남들이 하루에 버는 돈을 평생 만져 보지도 못하는 사람들, 기성 정치를 불신하고 진보 진영에 대해서 회의하는 사람들, '자기'를 주장하는 여권 운동가와 신세대들 사이에서 이도 저도 못하는 수많은 '아줌마들', 거리로 내몰려 '삐끼', 폭주족이 되거나 룸살롱과 단란주점에서의 하루벌이로 오늘이 인생의 전부인 삶을 사는 아이들, 이들의 존재가 바로 우리 사회의 원한의 수위를 높여가는 것이다. 낙관적인 혁명가들은 혹시 이들의 원한이 최대 수위에 도달하는 순간이 '혁명'의 순간이라고 은근히 기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의 거울에 비춰보면 이들의 원한은 파시즘이라는 혁명의 순간을 불러내기도 한다. 따뜻한 가족의 품이 안전지대가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현실적 강제 덕분이다. 가족의 경계 바깥에 어떠한 안전지대도 마련하지 않는 사회, 이 사회가 수많은 사람들을 무사회적 고립자, 거리의 사람들로 만든다. 전후의 작품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이러한 무사회적 고립자들의 원한이 그들로 하여금 따뜻한 가족의 품 외에는 어떠한 탈출구도 찾을 수 없게 만드는 현실, 바로 그 현실이 위험사회로 달려가는 지표인 것이다.
--- p. 61-62 모성신화와 가족주의, 그 파시즘적 형식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