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D. 175년 이전에 Jn-이는 이 책에서 정경으로 인정받는 복음서를 명시하는 것으로서, 때로는 네 번째 복음서를 가리키는 FG(Fourth Gospel의 이니셜-역자주)을 명시하는 것으로서, 그리고 오한복음의 저작권을 예단하지 않고 최종 편집자 요한을 명시하는 것으로서 사용된다- 이 받아들여지면서 겪은 어려움을 되짚어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요한복음이 자기들의 입장을 지지해 준다고 생각했던 영지주의자들이 행한 요한복음 해석은 영향력 있는 것이었다.
저자 미상인 2세기 후반의 무라토리안 정경(Muratorian Canon)은 아마도 로마에서 기록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조악한 라틴어로 쓰여진 85행짜리 단편인데. 9-16행에서는 요한이 그의 동료 사도들과 감독들의 재촉으로 그 복음서를 썼다고 말한다. 그들은 "우리 각자에게 어떤 것이라도 계시가 주어진다면 서로 이야기하자"고 했었다.
그런 후에 요한의 제자 중 하나인 안드레에게 계시가 주어졌는데 그 내용은 "제자들 모두가 그 계시를 살펴봐야 하는 반면에, 요한은 그 모든 것을 요한 자신의 이름으로 써내려 가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복음서는 복음서들의 끝자리에 오는, 열두 제자가 공유하고 있는 계시의 종합으로 생각되었다.(그러나 그 단편의 첫행은 마태에 관한 언급으로 시작하지 않고 마가에 관한 것으로, 그리고 누가에 관한 것으로 시작한다) 로도비코 무라토리(Lodovico Muratori)가 일구어낸 1740년의 발견은 몇몇 문서들을 이교적이라는 이유로 명백히 거부한다. 아마도 이런 사실을 소아시아의 어떤 이단들이 그 무라토리안 정경이 요한복음을 수용하고 있음으로 인해 요한복음을 영지주의자인 쎄린투스(Cerinthus)에게서 기인한 것으로 여긴다는 데 대한 은연중의 대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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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의 창을 통해서 요한 공동체의 역사(혹은 1세기 후반의 제국의 한 쪽 구석에서의 삶)를 파악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러나 이 복음서 기자의 작품은 근본적으로는 역사가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story)이다. 복음서 기자의 작품은 어떤 한 사람에 관해서, 즉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어떤 일을 행했는지, 또한 그가 누구와 관계를 맺었고 어떻게 죽었는지, 또한 결코 죽지 않을 것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예수는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인간이 되신 하나님(godhead in humanity)이시라는 종교적 믿음을 가지고 신앙되었기 때문에 이 복음서 이야기들을 하나의 이야기로서 보는 데에는 상당한 주저함이 있어 왔다.
이 복음서 이야기들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법의 탁월함 때문에 찬양받아 왔으나 그런 전달 방법적인 측면보다는 오히려 계시된 교리의 보고(寶庫)로서 여겨진다. 사건이 과연 기록된 대로 일어났는지 아닌지를 물으면서 1800년대 어간에 역사의 '쟝르'가 신약신학의 전면에 강력하게 부상(浮上)되었기 때문에 지난 두세기 동안의 일련의 신약성경 연구 대부분은 역사적이었다. 최근에 와서야 신약성경 연구는 복음서들의 자료를 추적하는 것이 아닌, 어떤 의미에서 문학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되어왔다. 때때로 성경 해석가들은 '역사-비평적'(criticalhistorical)이라는 문구를 사용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동어반복(tautology)일 뿐이다. 지금까지는 사실상 두 단어 중 한 가지가 그 나머지를 의미해 왔다-적어도 성경연구에서 말이다.
그러나 미술비평가는 역사학자가 아니다. 뿐만 아니라 문학 비평가도 역시 역사학자가 아니다. 미술비평가나 문학비평가 양자 모두 작품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지를, 그 세련된 양식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무엇을 말하는지를, 그리고 그 작품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편적인 가치를 드러내는지를 묘사함으로써 그들의 비평적 기능을 실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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