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인이건 내인이건 어느 한쪽만이라도 없었다면 우리 민족은 통일되었을 것이다. 초기의 분단은 물론 외세가 가져다준 것이었지만 여기에 영합한 내인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민족 내부가 단합했다면 강요된 외인을 투쟁을 통해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해방정국 이후의 역사적 변화를 돌이켜 볼 때 이제 한반도 분단을 강요했던 냉전체제는 한반도 외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제 외세는 분단 극복에 있어 ‘민족 내부의 대화’를 강조하면서 분단의 책임을 민족내부로 전가시키고 있다. 이러한 책임회피적인 태도의 무책임성은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국제 체제가 민족 내부에 유리한 쪽으로 점차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민족의 ‘자주적 공간’ 확보라는 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이다. 따라서 해방 정국의 상황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외세에 영합해서 분단구조를 강화시킬 것이 아니라 민족 내부의 불신과 반목을 해결해야 통일의 길이 열릴 수 있다는 것이다.
--- p.88
전쟁 발발 이후의 전개 과정을 보면 더욱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 세계적으로 냉전이 막 시작된 시점에 서방 진영이 단합해 침략 세력을 물리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국제평화기구인 유엔이 즉각적으로 전쟁 당사자가 되기보다는 좀 더 평화적인 해결 방안을 강구했어야 했다.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고 유엔군이 전세를 뒤집어 38선에 도달해 원상회복을 한 이후에도, 유엔은 즉각적으로 북진해 새로운 전쟁을 일으키기보다는 평화적 해결 방안을 강구해 중국의 개입을 막았어야 했다. 휴전에도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 있다. 인도적 차원에서 포로의 자발적 의사에 따른 송환은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없지만, 이 문제로 인해 협상이 지연되면서 전투가 2년이나 더 지속되는 것을 막을 방법은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 p.136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이승만은 공산주의자들이 한반도에 남아 있는 한, 남한의 안전은 보장될 수 없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한국 안보에 대한 위협의 근원인 공산주의자들을 무력으로 격퇴시키길 원했다. 그러나 위협의 제거가 불가능해지자 이승만은 미국의 안보 공약을 확보함으로써 북한의 위협에 대한 방어력을 높이고자 했다. 특히 이승만은 미국과 방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동맹관계의 제도화를 꾀했으며, 이 과정에서 북진통일론을 자신의 협상력을 높이는 데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은 기본적으로 소련의 영향력이 한반도 전체에 미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소극적인 것이었다. 비록 6·25 전쟁 발발을 계기로 미국의 정책이 적극적 개입으로 전환되었으나, 미국 정부는 대륙 세력과 전쟁에 휘말릴 것을 우려해 한국과의 상호방위조약 체결은 꺼려했다. 하지만 이승만이 단독 북진 가능성을 앞세우며 벼랑 끝 외교를 펼치자 미국은 한국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 p.165
미군의 ‘용병’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남북 관계가 긴장되는 등 부정적인 영향도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용병론자인 블랙번은 파병의 명분이나 임무의 성격은 중요하지 않다고 보고 파병 대가로 경제적인 보수를 받았는지를 가장 중시한다. 그는 존슨 정권의 ‘보다 많은 국기(more flags)’ 정책의 당초 목적은 미국의 베트남 정책에 대한 자유세계의 지지를 상징하는 것이었지만, 1964년 12월부터 군사적인 색채가 강화되었으며, 특히 미 지상군이 투입되는 1965년 3월부터 미국은 미군과 함께 싸우는 전투부대의 확보에 중점을 두기 시작했다면서 파병 대가로 경제적인 보수를 받지 않은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와 달리 한국, 태국, 필리핀 군대를 용병으로 규정했다. 블랙번은 연간 1만 3000달러의 비용이 드는 미군에 비해 절반 정도의 저렴한 비용으로 한국군을 고용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한국군은 독자적인 작전통제권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용병론만으로 한국의 파병 정책이나 이유를 충분히 설명할 수는 없다.
--- p.214~215
박정희의 안보 위기론은 더 이상 명분이 없었고, 국가 생존을 위한 동원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었다. 오히려 한·미 관계를 악화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했고, 이는 박정희 정권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박정희는 자신이 역설한 강력한 체제 구축을 단행하기 위한 전략적 차원에서 일시적으로 데탕트에 동참했고, 북한과의 대화를 추구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는 유신체제로의 전환을 위한 필요의 창출에서 안보 위기를 가장 큰 무기로 활용했다. 그러나 그 무기의 실효성이 약화되었을 때, 그는 대화를 통한 통일이라는 새로운 유신의 필요성을 창출해 내는 능력을 발휘한 것이다(임혁백, 2005: 122). 따라서 박정희의 입장에서 7·4 성명은 유신체제 구축을 위한 정치적 밑거름에 불과했다. 7·4 성명은 미국의 남북화해 요구를 어느 정도 반영하는 외교적 카드이자, 동시에 일정 부분 체제 변동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 p.248
1979년 말 한국에서 출현한 신군부 그리고 이들의 군사정권은 정통성의 부재를 만회하기 위해서 박정희 정권과는 달리 적극적으로 미일동맹에 편승하는 정책으로 전환했고, 이러한 해양 3국 연대의 구도가 북한으로 하여금 유화적 자세를 취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물론 북한의 대외 자세 변화에는 전통적 동맹국인 중국과 소련의 북한과의 ‘거리 두기’가 또 다른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한마디로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의 한반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형성된 전 세계적인 냉전체제의 전초 위치에서 이탈하고 있었다.
--- pp.277~278
1989년 정치권 전반을 지배한 공안정국은 폐지 논의가 진행되고 있던 ‘국가보안법’을 정치적 목적으로 남용하고, 다양한 통일 논의를 가로막고, 정치적 분위기에 편승한 우익단체들을 비호한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또한 노태우 대통령이 ‘7·7 특별선언’을 발표해 국민들의 남북교류에 대한 열망을 높였으면서도, 이와 관련한 법제도 정비가 늦어지면서 연이은 방북 사건을 초래했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 p.311
1990년에는 남북고위급회담이 성사되었고, 1991년 9월에는 서로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던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했다. 1991년 12월 13일에는 남북한이 ‘남북한 기본합의서’를 채택해, 서로의 체제를 인정하고 상호 불가침 및 남북교류와 협력 확대를 위해 노력할 것에 합의했다. 동·서독의 통일과 유럽의 통합 과정에서 볼 수 있었던 신기능주의적 협력의 모습이 남북한 사이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동·서독과 달리, 남북한은 냉전이 종식되면서 잠시 열렸던 기회를 충분히 살리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탈냉전의 흐름 속에서 북한은 결국 서방세계와의 교류협력 확대 대신 핵무장이라는 길을 선택했고, 남북 관계는 물론 미국, 일본 등 주요 서방국가들과의 관계 역시 급속히 경색되었다. 그리고 북핵 문제는 2019년에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 p.357
현재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 지역은 19세기 말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그리고 구소련의 붕괴와 동유럽 사회주의국가의 체제 전환과 비견될 만한 전 지구적 차원의 변화에 직면해 있다. 한반도와 동북아 지역은 지정학적으로 저주받은 “아시아의 발칸”이라고 불릴 만큼 복잡한 상황이 더 심화되고 있다. 남북의 분단구조는 그대로이고, 탈냉전 도래 후 20년을 훌쩍 넘겼음에도 냉전적 대결 구도는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미국의 영향력 약화와 일본의 침체, 중국의 급격한 부상이 겹쳐지면서 불안정성이 점점 증대되어 왔다. 이런 와중에 우리는 미·중 관계, 동북아, 한반도 영역에서 세 가지 역설, 즉 패러독스에 직면해 있다.
--- p.439
‘신한반도 체제’가 앞으로 다가올 100년이라면 지난 100년 이상 한반도를 짓누르고 있었던 질서를 ‘구(舊)한반도 체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구한반도 체제’를 단 하나의 모습으로 특정하고 규정하기는 어렵다. ‘구한반도 체제’는 구한말 열강의 침탈과 일제 강점, 전쟁과 분단 그리고 냉전이라는, 오랜 기간 한반도가 타자에 의해 경험하고 강요당한 고난의 산물이자 집합체다.
--- p.4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