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권태는 특히 아이들과 관련이 있다. [바냐아저씨]에서 매사 따분한 엘레나는 작품 속에서 가장 나이가 적을 뿐만 아니라 어린애 같은 면이 있기도 하다. 아이들은 아무런 부끄럼 없이 권태, 그러니까 지루함이나 따분함에 대해 불평한다. 반면 성인들은 권태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면서도, 권태를 부정하기에 여념이 없다. 한 마디로, 너무 어른이 되어 버린 것이다. 성인들은 권태에 빠지지 않도록 스스로를 다그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마 그 때문에 권태를 내색하는 일이 덜한지도 모른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자기는 권태와는 거리가 멀다고 자랑스럽게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은 대부분 거짓말이다. --- p.20 「1장 '권태 제대로 알기'」중에서
런던 이스트에드의 "아편 피는 사람들"
불법 약물 복용, 심지어 약물을 복용하는 행위 자체도 도파민 생성을 왕성하게 한다. 그림 속에서 아편을 취해 널브러져 있는 이 사람들은 도파민이 넘쳐나서인지 권태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하다. 그러나 맨 가운데 있는 남자에게서 이들이 그렇게도 벗어나고 싶어 하는 권태를 감지할 수 있다. 언제 다시 권태가 찾아올까? 더 큰 괘락을 찾는 일 이에, 달리 어떤 방법이 있을까?
안나 고슬린은 2007년 한 기사에서 이렇게 썼다. '만성적인 권태에 빠지면 우울증, 근심, 약물 중독, 알코올 중독, 도박 중독, 섭식 장애, 적대감, 분노, 대인기술 부족, 학업 성적 및 업무 실적 저조가 나타날 위험성이 크다.' 그러나 어떤 게 먼저일까? 만성적 권태가 병적인 행동을 일으키는 걸까? 아니면 부족한 도파민이 곧바로 병적인 행동을 일으키는 걸까? 연구에 따르면, 만성적 권태는 위험 행동 및 자극 추구와 마찬가지로, 도파민 불균형의 한 증상인 것으로 추정된다. 만성적 권태는 원인 인자가 아니다. --- p.78 「2장 '만성적 권태와 그 무리들'」중에서
앵무새
동물이 느끼는 권태의 속성에 대해서는 동물 심리학자 프랑소와즈 베멜스펠더와 마크 베코프가 실질적인 결론을 내렸다. 인간과 마친가지로, 동물이 느끼는 권태 역시 예측 가능하고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의 결과다. 대부분의 동물의 경우,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란 우리에 갇히거나 쇠사슬에 묶인 상태를 말한다. 베멜스펠더는 권태를 '억제된 자발적 관심'이라고 묘사한다. 이에 따르면 감금된 상황에서는 자발적 관심을 기울일 기회, 즉 주변 환경과 자발적으로 상호작용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적어진다고 한다. 그 결과 권태가 찾아온다. 베멜스펠더는 감금 상태에서 동물과 인간이 보이는 반응이 비슷하다고 말한다. 감금 상태가 지속되면, 동물은 우선 권태를 실질적으로 인식한다. --- p.123 「3장 '인간, 동물, 감금'」중에서
(중략) 악마는 수도자의 눈앞에 그의 금욕적인 삶의 숱한 고난을 고스란히 펼쳐 보이면서, 그의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강조한다. 온갖 농간을 동원하여 수도자가 은둔 생활에서 탈출하도록 만든다.
위는 초기 기독교 시대의 영성가 에바그리우스가 쓴 [여덟 가지의 악한 생각에 대하여]의 한 구절이다. 아마도 실존적 권태에 대해 자세히 기술한 가장 최초의 글이 아닌가 싶다. 에바그리우스와 이후 성직자들 사이에서 자주 언급된 수도자들의 병을 뜻하는 아케디아acedia는 흥미로운 그리스어다. 이는 '나태', '게으름' 내지는 '무관심'을 뜻하는데, 영어로는 'accidie'다. 이 기이한 상태를 일으키는 존재 그리고 이 상태 자체의 별칭은 '한낮의 악마', '한낮의 악령', 또는 '정오의 마귀'라고 한다. 이 별칭은 시편 90장에서 빌려왔다.(아래는 위클리프 성경에서 발췌한 내용으로 약간 현대화되었다).
주님의 진실이 방패가 되어 우리를 보호할지어니 밤의 공포가 두렵지 않으리로다. 대낮에 날아다니는 화살이 두렵지 않고, 어둠 속을 활보하는 마귀가 두렵지 않으며, 한낮에 엄습하는 악마가 두렵지 않도다. --- p.150 「4장 '한낮에 덮치는 병'」중에서
사회학자 벤 앤더슨의 한 논문에 따르면, 권태가 18세기 계몽시대에 발견되었다는 주장은 권태가 '소외감이나 사회적 무질서라는 개념과 직관적으로 연관된다는 믿음에 기초한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권태, 소외감, 사회적 무질서는 모두 근대의 독특한 현상이다. 18세기 이전까지 권태는 기껏해야 주변적인 경험에 불과했고, 이성의 시대에 들어서야 개인의 지위가 중요해졌다. 이 시기에는 신탁 정치, 독재 정치, 전통적인 특권, 그리고 집산주의 전통의 맹목적인 고수에 도전이 가해졌다. 그러다보니 이 소용돌이치는 사회적 변화 속에서 개인과 개인의 감정의 중요성이 새롭게 부각되어, 권태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중략)
또 개인의 권리(벤 앤더슨은 이를 '진보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개인주의의 등장'이라 했다)와 더불어 내적 경험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한다. 앤더슨은 여기에 또 한 가지 변화로 관료화를 덧붙였다. 그는 시간과 공간의 표준화 및 조직화에 대한 반응으로 권태가 생겨났다고 설명한다. --- pp.206~207 「5장 '권태에도 역사가 있나?'」중에서
호주 원주민의 치아 뽑기 의식, J.Neagle
어떤 특정한 정서를 나타내는 언어적 표현이 없다고 해서, 그 정서가 인간이나 동물에게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니 말이다. 동물은 기본적 정서뿐만 아니라 권태를 비롯한 사회적 정서도 느낄 수 있다. 이 가설을 인정한다면, 어떤 시대의 사람들이라도 권태라는 단어가 존재하는지의 여부와 상관없이, 권태를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중략)
이 관점은 각기 다른 사회와 시대에도 적용될 수 있다. 이 장의 초반부에서도 말했지만, 호주 원주민과 같은 수렵 채집자들의 위험하고 바쁜 생활에서는 고대 베네벤툼의 무료한 일상에서보다 권태를 느낄 겨를이 적었을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권태를 느낄 수 있지만, 모든 사회에서 인간이 권태를 느끼는 건 아니다. 철학자 존 설의 표현을 빌리자면, '권태란 창조된다기보다는 주기적으로 재발견된다.' 이 재발견이라는 개념은 양 극단을 이루는 구성주의 와 본질주의 사이에서 좀 더 절충적인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 --- pp.212~213 「5장 '권태에도 역사가 있나?'」중에서
프레데릭 레이턴, "고독"
여가 시간은 실용과 도덕과는 무관해야 한다. 또 즐겁고 사교적이어야 한다. 이 모든 게 권태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요즘의 여가 개념은 일과 너무 결부되어 있어서 결국엔 권태가 끼어들 것 같다. 왜 안 그렇겠는가? 일이 권태롭다고 하면, 일의 연장선인 여가 역시 권태로울 수밖에 없다. 여가 시간이 권태에서 자유로우려면, 실용적인, 도덕적인 또는 상업적인 목적이 전혀 없는 활동으로 채워져야 한다. 이 생각은 아마도 팀 윈튼의 소설 [브레스Breath](2008)에서 가장 잘 묘사하지 않았나 싶다. 그는 소설 속 여가 활동인 서핑을 '완전히 무의미하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묘사했다.
권태는 맘만 먹으면 쉽게 벗어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된다. 어떤 정서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과소평가 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바로 이 정서들을 통해 세상을 알고 또 스스로를 이해하기 때문이다.
--- p.251 「6장 '권태로 돌아가는 긴 여정'」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