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가 보지 않은 여행지에 대해 부모님께 어떨 것 같냐고 묻는다면 ‘다 좋다!’는 답변이 돌아올 확률이 높다. 그래서 거기서 뭘 하고 싶냐고 물으면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이 크고. 평소 부모님의 취향과 성격을 눈치껏 섞어 여행지를 우선 정하고 코스를 한번 짜 보자. 이를 바탕으로 조금 더 상세한 브리핑을 한다면 솔직한 의견이 흘러나올 가능성이 커진다.
자연파 VS 도시파
바다 VS 산
미술관 VS 시장
여행은 자유지! 여유로운 일정 VS 여행은 경험이지! 빡빡하지만 알찬 일정
숙소가 그래도 제일 중요하지 VS 잠만 자면 되지, 아껴서 맛난 거 먹자
유명한 액티비티도 다 해볼 거야 VS 활동보다는 편안한 관광이 좋아
식사는 현지인 맛집에 도전하겠어 VS 한국인에게 유명한 맛집이 안전하지
그래서 한식은 언제 먹을 거니 VS 여행에서 한식은 사치야
걸으면서 구경하는 재미 VS 차로 편안하게 돌아보는 재미
여유로운 조식 VS 야식에 맥주 한 잔
취향과 주어진 시간과 예산을 잘 안배하여 이번 여행 베스트 여행지를 선정하길 바란다. 다만, 우리 부모님과 같이 해외여행 경험이 많지 않다면 ‘많이 들어 본 곳’을 우선 함께 다녀와 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오래간만에 떠난 효도 여행, 다녀와서 부모님의 오랜 자랑거리가 될 수 있도록 말이다.
--- 「여행 팁 1 : 여행지 선정과 코스 짜기」 중에서
서양인 눈에는 다 똑같아 보인다지만, 한국 중국 일본 사람은 서로를 구분할 수 있다. 먼발치부터 ‘한국인’임이 유력한 두 청년이 보였다. 투블럭 커트에 둘러맨 힙쌕, 티셔츠 목에 건 미러 선글라스까지. 가까이 갈수록 한국인이란 확신이 들었다. 한 번 얼굴에 철판을 깔고 생생한 정보를 얻어보리라 기대하며 바로 우리말로 말을 걸었다.
“한국인이세요?”
“네! 맞아요. 와 어떻게 아셨어요?”
“딱 한국인 같아 보여요! 죄송하지만 뭐 하나 여쭤봐도 될까요? 이 가게는 안주 어때요?”
“괜찮아요. 아 사실 저희도 오늘 처음 와본 거긴 한데…….”
간만에 나 아닌 한국어 화자와의 대화에 신이 난 엄마가 대번에 결정을 내렸다.
“그럼 그냥 이 집에 앉자!”
처음에는 분명 낯선 청년들과 테이블이 떨어져 있었던 것 같다. 상호 반가운 마음에 테이블을 넘나드는 대화가 끊이질 않았고 결국 테이블을 통째로 들어다 붙였다. 거슬릴 향이 없는 마가린 구이 해물 안주에 생맥주잔을 짠-짠- 부딪히다 보니 엄마도 몹시 흥이 나 보였다. 테이블에 500mL 맥주잔이 쌓여갈수록 처음 만난 청년들과의 이야기도 깊어졌다.
엄마로서는 아들뻘이라, 이들과의 대화를 어색해할 줄 알았건만. 의외로 낯선 장소에서 경숙 씨는 그저 한 명의 여행자가 되어 다른 여행자들과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저 하노이에서는 어디가 제일 좋았는지 묻고, 우리가 갔던 여행지 중에 별로인 곳을 알려줬다. 또 둘은 언제부터 친구였는지, 새로 취업한 그 회사 근무 강도는 어떤지 친구들에게 끝없이 질문했다.
--- 「엄마도 헌팅을 좋아해」 중에서
구멍 숭숭 뚫린 민소매 티셔츠는 보기만 해도 시원했고 귀여운 프릴이 달린 빨간 체크 오프 숄더 원피스는 태국의 새파란 가로수와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요 며칠 엄마도 더위 때문에 고생을 좀 했다. 여행 오기 전 ‘예쁜’ 옷은 여러 벌 샀지만 ‘시원한지’는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슬 달린 쉬폰 블라우스, 새로 산 일자 청바지. 예쁘지만 이곳 날씨 속에선 부담스러운 복장이었다.
“엄마, 이런 민소매 원피스 한번 입어볼래?”
“아이고 얘, 아줌마가 어떻게 이런 걸 입어!”
하긴, 엄마가 민소매 입는 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아줌마가 어때서, 여기 사장 아줌마도 입고 있잖아.”
가게를 지키는 아줌마 역시 민소매 티셔츠 차림이었다. 엄마 또래로 추정되나 짧은 반바지도 입었다.
“그래도……. 좀 그렇잖아.”
“저기 태국 아줌마도 반바지 입고 다니는데? 여기서는 다 이렇게 입고 다녀.”
“아줌마가 이런 거 입으면 욕해.”
“여기서 안 입으면 어디 가서 입어볼래? 여기 아는 사람 누구 있다고! 시원하게 입고 다니면 좋지.”
성화에 못 이긴 엄마가 손으로 옷감을 한번 훑었다. 부드럽게 몸에 감기지만 달라붙지는 않을 찰랑한 재질이다.
“시원하긴 하겠어.”
그래봤자 한 벌에 만 원 남짓. 엄마가 안 입으면 내가 입는다는 심정으로 남색 바탕에 노란 꽃이 그려진 민소매 원피스를 샀다.
의외로 뱃살을 가려주는 통짜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다음 날, 엄마가 새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가겠다고 나섰다. 거기에 어제 산 흰 깃털 귀걸이까지 더하니 한층 더 태국 부인 같이 보였다. 팔뚝이 굵어서 민소매는 싫다던 엄마, 날씨에 어울리는 차림새로 꾸미고 나오니 훨씬 자유롭고 편안해 보였다.
“민소매가 이렇게 시원하네. 아휴, 진작에 이런 것만 사 올걸. 내일은 네 것 입을까~?”
--- 「걱정 마! 외국 애들은 다 이렇게 다녀」 중에서
“딸, 엄마 너무 행복했어. 태국이랑 베트남 둘 다 재미있었어. 네 얼굴 보기도 힘든데, 보름이나 같이 있어서 너무 좋았고 네가 외국까지 데리고 와 줘서 더더욱 좋았어. 엄마가 가끔 성질내서 미안해. 다음에 또 엄마랑 여행 갈 거지?”
“나도 짜증 내서 미안해. 우리는 둘 다 성깔도 똑같나 봐.”
“그건 그래. 둘 다 양보가 없잖아.”
“엄마 닮아서 그래.”
“아니야 네 아빠 닮은 거야. 엄마는 성격이 온화하잖니.”
“…….”
“그래도 다음에도 같이 여행 가자. 다음에는 좀 덜 싸워보자.”
더 잘해보려다가 서로에게 성질부린 줄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안다. 우리가 그 정도 사이는 되니까.
세상에 엄마 닮은 아줌마가 많고 많지만, 우리 경숙 씨는 지구에서 내 말을 제일 관심 깊게 들어주는 사람이다. 나랑 입맛이 제일 비슷할 친구다. 몸의 길이와 둘레는 다르지만, 실루엣은 거의 일치하는 유일한 생명체다. 급전이 필요하다고 말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통장에 든 돈을 다 부쳐 줄 세상 유일한 아줌마다. 경숙 씨는 이제 제 남편보다도 어쩌면 제 엄마, 아빠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는 것 같다. 나도 엄마를 좋아하지만, 언제 엄마가 나를 사랑하는 것만큼 그녀를 사랑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건 아마 평생 불가능한 크기의 사랑일 것이다. 경숙 씨 손 마디가 단소만큼 굵어지게 한, 경숙 씨 다리에 하지 정맥이 생기게 한 사랑의 무게다. 아, 언제쯤 나는 엄마를 엄마만큼 사랑할 수 있을까.
--- 「나도 마냥 좋았던 것만은 아니라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