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장이 늦었습니다. 막바지에 다다른 전시 준비로 정신이 없었네요. 다행히 전시는 잘 열었습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이곳저곳에서 그대로 진행될까 싶던 일들이 미뤄진다는 소식이 들려오네요. 전시와 강연이 취소되고 미술관은 재개관일이 정해지지 않은 채 휴관하고 있어요. 많은 것이 멈추고 있는 지금, 미술도 예외는 아니겠죠. 그래왔겠지만, 아주 약한 지반을 디디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미세한 균열에도 흔들리거나 무너지거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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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발 코로나’라고 불리는 사건 이후 대부분의 가게들은 손님이 없는 상태로 운영되었다. 도시 전체가 비대면 상태로 전환되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자가격리 경험이 있는 드랙퀸 정글을 만나게 되었다. 그의 집에 있는 공연을 위한 소품들은 기능을 멈춘 지금 이태원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화려했던 이태원의 밤과 대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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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 미착용자의 입장을 제한하는 문구가 상점 입구마다 붙어있는 것이 지당한 세계. 이 이상한 세계에서 우리는 일 년 가까이 살고 있다. 마스크 착용은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고, 전염성이 강한 웃음도 마찬가지. 마스크는 웃음의 확산을 막는다. (포복절도는 침까지 튄다. 금지!) 나는 가로로 세로로 벌어진 너의 입을 보고 싶다. 입 동굴 속에서 흔들리는 너의 목젖 보고 싶다. 물결치는 너의 얼굴 보고 싶다. 웃음이 완성되는 걸 보고 싶다. 그게 전부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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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아는 수많은 스태프들 없이 사진을 찍는 법을 다시 배워야 했다. 그는 직접 전화와 이메일로 촬영 스케줄을 조정하고, 아들 핀과 함께 조명을 나르고, 창문 안의 모델에게 손짓발짓으로 의사를 전달하며 카메라를 다룬다. 이것은 그가 처음 접하는 ‘비대면’ 방식의 촬영이었다. 모델과 악수 한번 하기는커녕 어깨에 묻은 솜털을 떼어줄 수도 없다. 충분한 조명을 동원할 수 없으므로 촬영할 수 있는 시간은 대단히 짧다. 사흘에 한번 저녁 어스름이 이는 순간에만 줄리아와 핀은 사진을 찍었고, 불과 몇몇 포즈를 취하고 나면 어느새 해가 떨어져 철수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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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를 쓰는 일상과 함께 나는 기어코 거부했던 약물 치료를 시작했다. 알약 몇 개를 입에서 굴리고 내 기분이 영원히 나아지는 상상을 했다. 핸드폰 스크린을 손가락으로 굴리다가 나와 비슷한 나이인 한 여성의 유서를 읽었다. 단조롭고 경쾌하다는 점에서 의아한 기분이었다. 뉴스는 20, 30대 여성 자살률이 높아지고 있다고 보도를 하고 있다. 길고 얕게, 자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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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속의 사람들은 이탈리아 페사로의 산살바토레 병원에 근무하는 의사와 간호사들이다. 코로나 확진자와 사망자가 증가하는 가운데, 의사와 간호사들은 2교대로 근무하며 12시간 동안 쉬지 않고 일을 해야만 했다. 나는 근무 교대를 마치고 탈진 상태로 있는 그들의 모습을 촬영했다. 그들은 카메라 앞에서 마스크와 모자, 장갑을 벗은 후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눈빛은 이 지옥 같은 상황에서 잠시나마 평온을 찾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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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해는 두고 두고 기억할 해프닝인가, 어떤 비참함의 시작인가. 모두가 처음 겪고 있다는 말은 위로가 되는가, 절망이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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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19의 영향력이 약해졌다면 성사됐을 5월의 원피스 모임을 종종 떠올려본다. 처음에는 스튜디오에서의 소박한 모임이었다가 나중에는 모두가 문을 열고 세상으로 걸어나가는 모임이다. 어느 날 세상의 모든 여자들이 원피스를 입고 쏟아져나오는 장면에 대한 상상이다. 실컷 원피스 구경을 할 수 있겠지. 여자란 여자는 다 있으니 마음껏 여자일 수 있겠지. 모르긴 몰라도 그들이 입고 나온 원피스는 다 다를 것이다. 세상에는 그만큼이나 많은 원피스가 있는데다가 여자들은 또 얼마나 제각각 자기 자신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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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다운 시기의 (하늘에서 바라본) 공항은 갈 곳을 잃고 멈춰선 비행기들로 빼곡한 모습을 보여준다. 운항이 취소된 비행기들은 모두 지상에 내려앉게 되면서 터미널과 계류장뿐만 아니라 활주로까지 차지하면서, 마치 락다운이 끝나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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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술을 오므려 ‘텅 빈’이라고 발음하면, 이전처럼 쓸쓸함이나 외로움 정도에서 울림이 그치지 않는다. 이제 ‘텅 빈’ 풍경을 떠올리면, 전쟁터의 폐허보다 더 짙은 두려움이 번진다. 이제 ‘텅 빈’ 도시를 찍은 외젠 앗제의 파리 사진을 봐도 듀안 마이클의 사진 ‘Empty New York’을 봐도, ‘낯선... 몽환적... 초현실주의...’ 이런 식으로 운운하기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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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말 안으로 서툴게 잠영해 들어갈 수 있었다. 타고난 언어, 피부 안쪽까지 스며있는 나의 모국어 속으로. 모질게 보낸 시간에 부딪혀 깨어져있던 말을 건져올려, 붙이고, 연결하고, 기워서 완성하는 일이 이제야 가능해 보였다. 미안하다는 말, 사랑한다는 말, 잘 지내냐는 말, 보고싶다는 말, 이제야 깔끔히 당신을 증오할 수 있다는 말. 질서를 찾아내 이어붙여 보면 결국 아주 단순한 말이었다. 물 안에서 귀를 닫고 헤엄을 칠 때마다, 잃어버리고 놓쳐버린 말의 조각들이 바닥에서 떠올라 내게 다정하게 들러붙는 것 같았다. 물 안에서 울면 아무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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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사진은 한밤의 통증처럼 날카롭고 생생하다. 통증은 우리가 육체를 가졌음을 증거한다. 육체 없이는 통증도 없다. 나는 그녀의 사진이 한 장 한 장의 이미지가 아니라 하나하나의 통증어린 육체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녀와 그녀의 사진 속 존재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드러냄으로써 스스로를 일으켜 세운다. 이미지를 일으켜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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