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오후의 황금빛 광선을 기억한다. 반짝이는 빛은 창문으로 들어와 벽에 걸린 사진 액자 위로 순식간에 번지더니, 곧 재빨리 사라지고 말았다. 얼핏 보면, 빛은 덧없이 사라지는 것 같고, 사진은 영원히 남을 것 같다. 하지만 사진은 그저 현실의 일부를 본뜬 이미지일 뿐이고, 그 장면마저도 이미 현실에서 사라진 순간일 뿐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뜨고 지는 태양이야말로 내일도 변함없이 존재할 것이다. 그런데도 왜 사진이 빛보다 더 실제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 p. 15
한참을 이국적인 풍경과 대체 불가능한 풍광에 몰두하던 때가 지나고, 이제 ‘아름다운 순간’의 정의가 조금씩 바뀌는 시기를 살고 있습니다. 마음에 드는 공간에서 사진을 찍을 때 마스크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쓰고 있을까요, 잠시 뒤로 숨길까요, 쓰진 않지만 팔목에 걸고 있어야 할까요. 그 사진을 찍은 공간은 어디이고 왜 갔으며 가는 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을 지나쳤을까요. 제 결정은 안전한 것이었을까요. 고민과 갈등을 뒤로하고 그 순간을 기념하려고 할 때 전처럼 잘 기념할 수 있을까요. 오늘도 수백 명의 사람들이 고통스러운 판정을 받는 시대에 굳이 할 필요가 있는 고민인지 모르겠으면서도, 또 나 자신이라는 나에게 가장 중요한 인물이 일상을 살게 하기에 꼭 필요한 과정입니다.
--- p. 70
꿈에서 본 낯선 사람들 때문에 가슴이 아파 잠에서 깬 날이면 어김없이 새 문서를 열어 글을 쓰기 시작한다. 아픔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지난밤 꿈에서 만난 인물의 일생을 재현하고 싶어서다. 그럴 때면 선생님이 앞에서 불러주는 영어 단어를 단어장에 충실히 받아적는 학생이 된 것 같다. 트랙을 질주하는 레이싱카처럼 겁 없는 손가락은 받아쓰기를 빠르게 끝내고 싶어 하지만 상대적으로 느긋한 편인 머리가 만류한다. 진정해. 무작정 네 감정만 앞세울 게 아니라, 누가 읽어도 납득이 갈 만한 인물의 이야기를 만들어야지.
--- p. 72
우리는 자기 몸에 거짓 문신을 새기는 [메멘토]의 단기기억상실증 환자와도 같다. 그 일이 의미 없지 않았다고, 나는 불쌍하다고 중얼거리며 거짓 문장을 새겨넣고, 사진 몇 장을 근거로 믿어버리는 것이다. 그 겨울은 추웠지, 우리는 사랑했지, 나는 어쩔 수 없었지. 과거의 사건들은 이런 식으로 서사에 착취당한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현실이 아니라 이미지에 불과하다. 자기 연민에 사로잡혀 마음대로 휘갈겨 쓴 거짓 기억이라면 차라리 가지고 싶지 않았다. 정말로 자신을 싫어했고, 어떻게든 트집을 잡아 벌을 주려고 했던 시절이었다. 나는 사진도 찍지 않고 일상에 대한 짧은 글도 남기지 않은 채 꾸역꾸역 살았다. 십여 년이 지난 후, 나는 정말로 기억의 가난뱅이가 되었다.
--- p. 86
또 덮어두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나의 마지막과 그 사람의 마지막을 같이 두는 것이 아니라 나의 중간에서 그 사람의 마지막을 보거나 아니면 그가 중간쯤 왔을 때 나의 마지막을 보여주는 것이 더 나을 때가 있습니다. 덮어둔다는 것은 나머지 한쪽의 시간을 그냥 흐르게 하는 것이고, 그곳으로 흘러오는 것들을 마다하지 않고 반긴다는 뜻이며 한참 세상이 지나 그 위에 무엇이 쌓였다 해도 변하지 않은 것들을 다시 찾아내는 일에 가까울 것입니다.
--- p. 107
꼭 극적인 순간이 아니더라도 우리 삶에는 이런 결락이라 할까, 뭉친 자리가 몇 개씩 있는 듯하다. 고발 또는 보도 사진이 아닌 한 누구도 부정적인 순간을 굳이 사진으로 남기지 않는다. 그런 건 오래 기억하고 싶지 않을 뿐더러 가능하면 빨리 잊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런 순간은 잘 안 잊힌다. 복기와 반추를 통해 오히려 매번 다른 판본으로 각자의 영혼 속에서 여러 번 인화된다. 내겐 시장의 어느 후미진 수선집에서 코트 상표를 뜯어고치던 때가 그렇다. 나는 그 순간을 매번 다채롭게 경험하는데, 그때마다 내 자신을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3인칭 전지적 시점으로, 관찰자 시점으로, 과거형으로, 현재형으로, 망원렌즈로, 다초점 렌즈로, 현미경으로 본다. 그러곤 마지막에 늘 머리를 감싸고 운다. 한편으론 그걸 나만 봐서 정말 다행이다 생각하면서.
--- p. 116
써야겠다고 생각하지만 아직 쓰지 못한 ‘그 장면’이 있다. 나는 그걸 ‘찢어진 페이지’라고 부른다. 누구나 인생에서 찢어진 페이지 몇 장은 가지고 있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 건 쉽게 쓸 수 없다. 시간이 걸린다. 쓸 수 없는 이유는 내가 ‘그 장면’으로부터 상처받았기 때문이다. ‘그 장면’에 전염되어, 나 스스로가 ‘그 장면’이 되었기 때문이다.
--- p. 120
너의 순간과 나의 순간이 있다. 1930년대에 태어난 너의 순간과 나의 순간. 우리는 다른 시간대에 살았지만 동일한 순간. 우리가 겹쳐지는 순간. 내가 거울을 볼 때 거울 속에 나타나는 너의 순간. 나는 내 얼굴을 샅샅이 살핀다. 너의 흔적을 찾아. 그리하여 나는 죽은 여자의 순간적 발현. 시간의 거리를 넘어, 시제를 넘어, 연대기적으로 다른 시간대를 넘어, 시간의 내밀한 내부에서 우리는 동시적으로 거울에 손을 내밀며 하루를 시작한다. 동시에 차를 마시고, 동시에 버스를 타러 간다. 우리의 고독한 입김이 하나로 합쳐진다. 나의 숨소리가 낯설다.
--- p. 127
고정된 몸을 지닌 존재들은 모두 나와 너의 경계가 있다. 몸을 지닌 나와 너는 아무리 가까워지려고 애를 써도 하나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고정된 몸을 지니지 않은 빛과 물은 대상에 침투한다. 물은 젖어들고, 빛이 스며들고, 그런 순간에 물과 대상, 빛과 대상의 경계와 구분은 사라진다. 에바가 작업에서 주목하는 것 또한 바로 그런 순간이다. 물처럼 빛처럼 경계를 지우고 대상에 깊숙하게 파고드는 것, “사람이든 사물이든, 어떤 피사체이든 더 이상 다가갈 수 없는 한계를 지나서까지 침투하고 싶어요.”
--- p. 1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