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대체로 잘 보이지도 않고 닿을 수도 없는 세계로 들어갈 수 있게 해주고, 결국 세상과 삶에 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내겐 소중하다. 나 또한 사진 프로젝트를 통해 더 멀리 갈 수 있었고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 「페터 데켄스, 인터뷰」 중에서
함께 본 것은 아마도 초점이 또렷한 사진 한 장, 명확한 하나의 장면으로 귀결되지 않을 것이다. 종종 흐릿하거나 가늠하기 어려워 다시 서로의 시점을 빌려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전에는 스스로 볼 수 없던 것들을 마주할지 모른다. 타인의 몸과 눈으로 바라봤던 감각은 체화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른 방식의 보기, 신체의 일부가 된 어떤 바라봄은 알지 못했던 세계를 만나게 한다. 더디지만 견고히.
--- 「이민지, 〈우리가 함께 본 것〉」 중에서
자연스러운 포즈를 요청하며 촬영을 해나갔죠. “편하게 서 계시면 돼요. 너무 긴장하지 마시고 편하게”라는 말을 제가 반복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프로젝트에 참여하신 대다수의 분들은 ‘편하게’ 있는 게 쉽지 않아요. 근육이 자주 강직되어 몸의 통제가 어렵거든요. 끊임없이 뒤틀리고 움직이는 신체를 가지고 있는 거죠. 그런데 저는 ‘정지’라는 것이 그들에게 너무나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머리론 알고 있었지만 진정으론 알지 못했던 거예요. 그때부터 나도 모르게 ‘정지’를 ‘편안함’과 연결 지어 생각하고 상대에게 요구했던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됐어요. 대체 그 ‘편안함’이란 누구를 위한 것이였을까요?
--- 「이지양, 대담」 중에서
저는 휠체어에서 바닥으로 내려오기로 결정했죠. 내려와서 내게 자유로운 움직임으로 움직이고 표현하려고 했어요. 그런 저를 이지양 작가가 사진 찍고 작업했는데요. 이런 걱정을 많이 했죠. ‘내가 나 자신의 최적화된 모습이라 여기는 이미지를 사진으로 담았는데, 만약 그것이 전시되었을 때 관객들에게 몸의 비일반성(장애)을 소비시키는 이미지로 다가가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을 많이 하죠. 사진을 찍는 작가든 피사체가 되기로 한 모델이든, 장애를 다룬다고 하면 감수해야 하는 문제일 수도 있는데요. 어쨌든 저는 단순하게 소비되지 않는 이미지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을 여전히 갖고 있어요.
--- 「김원영, 대담」 중에서
나는 이 두 사람이 작업을 통해 만들어온 관계가 이들이 말한 하나의 ‘연립’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들의 작업을 보면 사진에서의 표현이란 관계적인 것임을, 표현하는 자에게만 귀속된 독자적인 것이 아님을 느끼게 된다. 마치 지금 이 글을 쓰는 내가 그들의 작업에 연립하여 문장을 만들어내고 있듯이.
--- 「장혜령, 〈서로 연립하는 몸들〉」중에서
‘장애’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회적 입장의 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걸 주제로 작품을 만들 생각은 없어요. 그러려면 차라리 복지 활동을 하는 편이 낫겠죠. 슬픈 일이나 기쁜 일, 미래를 상상하거나 과거를 떠올리는 일 등은 장애가 있든 없든 누구나 느끼고 생각하고 있잖아요. 신체뿐만 아니라 개인의 역할이 증식되고 복제되는 과정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지닌 숙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흥미로운 주제라고 느끼고 있죠.
--- 「카타야마 마리, 인터뷰」 중에서
모델 일을 통해 몸에 대해 자신감을 찾고 그들이 소속된 집단을 대변하게 된 여성을 동경했어요. 하지만 단 한 번도 눈에 띄는 장애가 있거나 휠체어를 타고 있는 모델을 볼 수는 없었죠. 제겐 제 몸과 제 휠체어가 잡지나 스크린에 재현되는 걸 보고 싶다는 갈망이 있었습니다. 모델이 된다는 게, 저한테는 옷을 차려입거나 사진에 찍히는 일 그 이상이라는 걸 어릴 적부터 알고 있었어요.
장애인 커뮤니티에 재현이란 더 깊은 의미를 띄고 있다는 걸 이해했던 셈이죠.
--- 「브리 스케일레스, 인터뷰」 중에서
우리는 주어진 결핍을 둘러메고 매일매일을 버티고, 때로 신비한 날을 맞이하고, 그 순간을 감지하고, 그 놀라움의 형태를 마음속에 그리고, 그것을 쓰고, 만들고, 실패하고, 다시 결핍 속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굴러가는 것이다.
--- 「최원호, 〈우리 모두 어둠을 더듬네〉」중에서
이런 이야기를 비유로 들어볼까요. 눈앞에 의자 두 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다리가 네 개, 다른 하나는 세 개입니다. 네 다리 의자를 기준으로 본다면 세 다리 의자는 다리가 하나 부족합니다. 다리 하나를 붙여야 할 것 같군요. 하지만 세 다리 의자는 실제로 서 있습니다. 세 다리 의자는 네 다리 의자와 방법이 다르겠지만 제대로 서 있습니다. 만약 세 다리 의자가 “다리 하나를 더 원해”라고 한다면, 그 바람을 이루도록 노력해야겠죠. 그게 아니라면 먼저 세 다리로 서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 「이토 아사, 〈시각으로 보지 못하는 세계〉」중에서
이봐요. 그러니까, 내가 지금 하고 싶은 말은… 아니, 그냥 여기, 탁자 위에 내 손을 올릴게요. 내 손등 위에 당신의 손을 얹어봐요. 좋아요, 그렇게요. 이제 눈을 감아봐요. 진동이 느껴져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진동이 느껴져요? 들을 수 있겠어요? 괜찮아요. 들리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냥 우리 이렇게 가만히 머물러봐요. 오, 그래요. 그러면 된 거예요. 그러면 된 거예요.
--- 「손보미 소설, 〈밤의 진동〉」중에서
열여섯 살에 수어를 처음 배웠고, 소통의 기쁨을 알게 되었습니다. 좀 더 여러 사람을 만나고 싶고, 더 많은 생명과 만나고 싶다는 것은 언제나 변함없이 제가 바라는 점이죠. 그런 만남 속에서 간혹 필담이나 수어로도 의사소통이 어려울 때가 있어요. 중증장애인도 그렇고, 동물들도 그렇죠.
그런 존재와 이야기를 나눌 때 언어 이외의 다른 방식이 있다는 걸 배우게 됩니다. 함께 TV를 계속 보거나, 오래 눈을 맞추거나, 길게 악수를 나누고, 밥을 같이 먹고, 그런 일들을 통해서 말이죠. 서로 침묵해도 함께 시간을 보내면 상대에게 전달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럴 때에 카메라를 들어요. 서로 말하지 않아도 소통이 가능하다고 느끼면 그때가 바로 셔터를 누를 타이밍이죠. 하지만, 그 또한 어쩌면 자기만족에 가까운 것일지도 몰라서 언제나 두려움도 따릅니다.
--- 「사이토 하루미치, 인터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