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좋아하니까 여름에 대해서라면 한없이 적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폭염 속에서 사람이 죽고, 누군가는 평소보다 고된 노동을 하고, 어떤 사업은 망하고, 그런 일들이 있다. 그래서 여름에 대한 낭만적 글쓰기를 조금은 머뭇거리게 된다. 그러나 여름에 갖는 기쁨과 여름에 갖는 슬픔이 공존할 수 없는 것들은 아닐 것이다. 계절이 아름다운 이유는 소멸하기 때문이고, 소멸과 슬픔은 한 몸이니까. 슬픔과 기쁨이 함께하는 곳이 세계이니까.
---p.88 「김선오, 〈여름의 시퀸스〉」 중에서
불분명한 정황과 서사를 뒤로하고 순간과 감각만이 명확하구나. 지금의 나를 만든 과거의 모든 일들이 떠오르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일까? 한 번에 한 가지 사건을 떠올려도, 사랑과 미움이 동시에 마음을 짓밟고 가는 건 왜 그러는 걸까. 나도 알아. 여름은 정답이 아니라 힌트일 뿐이야. 전 생애를 복기해도 여름만이 유난히 선명하다는 건 신기한 일이다. 이 나라와 이 도시에서 살아 있으니, 여름의 선명도를 위해 감각의 조리개를 활짝 열어두지 않아도 된다. 뭉개진 시간도 가장자리 선명하게, 로 뚜렷해질 수 있는 거지.
---p.94 「권누리, 〈친밀한 미래, 빛 호리기〉」 중에서
튜브를 끌고 돌아오는 모터보트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더 멀리, 그 너머를 바라보려고 했다. 조금이라도 더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 거대한 검은 머리들의 풍경을 담고 싶었다. 몸 구석구석을 파고들 듯 안아든 검고 불투명한 물과 오래오래 잠겨 있던 검은 머리들이 마침내 고개를 든 순간의 완벽한 풍경, 경치, 경개. 나는 바로 여기서 이렇게 여름이 끝났으면 했다. 누구도 본 적 없는 낯선 머리들과 지독하게 익숙한 머리들의 경계에서.
---p.134 「이반지하, 〈여름 경개〉」 중에서
유월 밤에는 살구나무 아래 앉아서, 열매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잠깐 딴청을 피우다 보면 그것을 금방 잊고서, 어둠을 울리는 소리에 흠칫 놀랐다. 칠월 낮에는 능소화가 송이째 떨어진 바닥과 그 사이를 살뜰히 오가는 개미들을 보았다.
거센 비가 자주 떨어졌다. 여름을 이루는 것은 오로지 거침없는 생명력인 줄 알았는데, 그전에 추락하여 죽는 것들이 많았다. 죽어서 다음, 또 다음이 있었다.
---p.183 「한정원, 〈여름 일기〉」 중에서
영이 돌아가고 난 밤불을 끄고 누웠을 때 어둠 속에서 누군가 희미하게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아버지의 실루엣이었다. 나는 갑자기 깨달아버렸다. 살아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그는 사십 대였는데 지금 내 집에 있는 이는 머리가 희끗하고 주름이 많고 구부정한 노인의 모습이라는 것을. 점점 늙어가고 있다는 것을. 이제 아버지가 진짜로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p.192 「강성은, 〈여름의 끝〉」 중에서
빛이 희미하게 사라지는 저녁 즈음일까, 아니면 빛이 슬며시 스며드는 새벽 어스름일까. 침대 주변에는 푸른 어둠이 무겁게 가라앉고, 하얀 침대 시트와 잿빛 이불과 베개에는 늙고 지친 사람의 손처럼 힘없는 주름만 가득하다. 아무리 바라보아도 누가 누웠던 자리인지, 그는 무슨 일을 겪었는지, 그는 지금 어디로 갔는지 사진은 말해주지 않는다. 다만, 그 자리의 주인이 떠난 후에도 사진 속에 남겨진 푸른 어둠은, 주름진 이불은 돌이킬 수 없는 후회처럼 아프고 씁쓸하게 다가올 뿐이다.
---p.202 「〈Night flower / Meditations〉」 중에서
얼마나 많은 카메라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공원을 찾았으며 얼마나 많은 공원이 지금껏 얼마나 많은 스크린에 모습을 비추었을까? 기묘한 것은 스크린에 결코 드물게 출현하는 장소가 아닌데도 공원은 여간해선 특권적인 영화적 기억의 장소로 자리매김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야외의 공공장소들 가운데서 공원은 일단 영화에 나오면 광장, 운동장, 수영장, 자동차극장 등은 말할 것도 없고 편의점 야외 탁자만큼의 존재감도 지니지 못하기 일쑤다. 분명 거기 있는 데도 이상하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보인다 해도 좀처럼 기억에 남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공원은 적어도 영화에 있어서라면 ‘公園’보다는 ‘空園’에 가까운 의미를 띠는 무규정적인 장소다.
---p.228 「유운성, 〈공원의 발견〉」 중에서
오늘날 이미지가 향하는 목적지가 어딘지 묻는다면, ‘몰입(immersion)’이라 답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 몰입형 전시에서 말하는 몰입에서 놀라운 점은, 그것이 암암리에 감각적 지각이 미적 경험의 모두라고 전제한다는 것이다. 예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경험이 무엇인지, 역사적 시대를 초월해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그런 것을 찾으려 애쓴다면, 우리는 그를 형이상학적인 미학을 좇는 망상이라고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p.234쪽 「서동진, 〈몰입의 이미지, 박탈의 경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