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책의 핵심 주장은 민주주의와 시장 자본주의는 ‘상호 보완적인 대립물’이라는 것이다. 이 둘의 결합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국가를 조직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점이 입증되었다. 하지만 이 결합은 또한 매우 무너지기 쉽다. 경제가 사회적으로 광범위하게 공유되는 번영을 제공하지 못하면 이 결합은 실패할 것이다. 그러면 국민들은 포퓰리즘 선동가들의 냉소적인 호소에 취약해진다. 민주주의는 실제로 무너질 수 있다. 오늘날 미국을 비롯한 세계 유수의 시장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민주주의, 자유시장, 자유무역에 점점 더 적대적으로 변해가는 세계에서 한국이 누리고 있는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국내 민주주의를 강화하고, 같은 생각을 가진 해외 국가들과 더욱 강력한 동맹을 맺어야 한다. 위험한 시대가 도래했다. 나는 이 책에서 왜 그런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설명하고자 한다.
---「한국어판 서문」중에서
이 책은 새롭고 문제로 가득한 이 시대에 대한 응답이다. 이 책의 핵심 주장은 단순하다. 우리의 경제와 정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면밀하게 살펴볼 때 자유, 민주주의, 계몽주의라는 서구의 핵심 가치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실질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20세기는 괴물 같은 독재자들의 세기였다. 비록 지난 세기 최악의 독재자만큼 끔찍한 자들은 아니더라도, 독재자들이 돌아온 것만큼은 분명하다. 시진핑(習近平)이 그렇고 블라디미르 푸틴도 마찬가지다. 도널드 트럼프, 인도의 나렌드라 모디, 브라질의 자이르 보우소나루도 독재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인구와 경제 규모를 고려할 때 이들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5개국에 속한다. 그들의 목표가 무소불위의 힘인 만큼, 이런 지도자들이 부상하면서 세상은 황혼을 맞이하게 될 수도 있다. 힘만을 섬기는 국가는 가망이 없다. 인류는 20세기에 이런 운명에서 벗어났지만, 겨우 간발의 차이로 빠져나왔을 뿐이다. 21세기에는 그런 운명에서 다시 한번 벗어날 수 있을까?
---「머리말: 나는 왜 이 책을 썼는가」중에서
미국은 단순한 하나의 국가가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유주의 세계질서를 창시한 나라다. 트럼프는 위대한 민주공화국의 대통령이 되는 데 필요한 인격, 지성, 지식이 부족했다. 그가 2016년에 집권한 것과 2020년 선거 패배 이후에도 공화당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민주주의 국가의 우려스러운 실패였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나는 경제적 실망이 고소득 민주주의 국가에서 좌파 및 우파 포퓰리즘이 부상하는 주요 원인 중 하나라고 주장한다. 사회적 지위에 대한 불안, 종교적인 신념, 노골적인 인종차별과 같은 문화적 요인을 지적하는 사람도 많다. 물론 이런 요인들 역시 실제로 중요한 배경 조건이다. 하지만 경제가 더 잘 돌아갔다면 이런 요인들이 사회에 그처럼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경제가 자신과 자녀에게 합리적인 수준의 번영과 기회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한다. 하지만 현실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좌절과 분노를 느끼게 된다.
---「Chapter 01 다음번이 아니라 지금 불이 났다」중에서
시장 자본주의, 특히 세계화의 ‘상승, 하락, 상승, 하락’이라는 패턴은 민주화의 패턴과 놀라울 정도로 일치한다. 세계화와 민주화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인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함께 진행됐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민주주의 국가의 비율이 급증했다. 그 후 세계 경제는 전간기에 급격하게 탈세계화됐다. 민주화는 당연히 세계화의 뒤를 따랐고, 무역이 붕괴하자 민주주의 국가의 비율이 급락했다. 무역과 민주화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최저점에 달했다. 그리고 전후 민주화를 향한 전환이 시작됐다. 이후 세계 경제의 개방성이 강하게 회복됐다. 1960년대가 되자 민주화는 안정화됐고, 1970년대에는 세계화가 이어졌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초에 민주화가 급격히 진행됐고, 세계화는 그 뒤를 바짝 뒤따랐다. 2000년대 초반의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마침내 두 가지 모두 안정화(또는 일부 측면에서는 감소)됐다.
---「Chapter 03 민주주의적 자본주의의 진화」중에서
민주적 제도, 글로벌 시장경제, 정치 및 경제 엘리트에 대한 신뢰는 최근 수십 년 동안 특히 기존 고소득 국가에서 약화됐다. 이는 보호무역주의, 이민에 대한 적대감, 그리고 무엇보다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으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이런 현상의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일까? 가장 큰 원인은 약 2,500년 전 아리스토텔레스가 입헌 민주주의의 핵심 구성원으로 지목한 중산층의 공동화(空洞化) 현상이다.
소득 분배의 중간 수준에 있는 사람들의 사회적 · 경제적 지위 하락은 지난 40년 동안 고소득 국가, 특히 미국 내에서 정치적으로 중요한 경제적 변화였다. 2007~2012년 대서양 양안 금융위기의 충격으로 이런 침식의 영향은 훨씬 더 심화됐다. 그 결과 정치 및 헌법 시스템이 전보다 훨씬 더 취약해졌다. 정치 시스템이 이런 식으로 취약해지면 예상치 못한 일을 포함하여 ‘무슨 일이든’ 발생할 수 있다. 2016년 영국의 브렉시트 투표와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이는 또 다른 ‘끔찍한 해(annus horribilis)’였다. 하지만 EU조차 여기에 취약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경제적 어려움, 불평등, 이민이 포퓰리즘의 주요 촉발 요인이라면 EU도 이 세 가지에 모두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다.”
---「Chapter 04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중에서
지식인과 상인이라는 두 엘리트 간의 갈등에 대한 피케티의 개념은 조지프 슘페터가 1942년에 발표한 고전적 저서인 『자본주의 · 사회주의 · 민주주의』에서 이미 제기한 바 있다. 슘페터는 자본주의의 성공으로 반자본주의적 태도 및 가치관을 가진 지식 엘리트가 더욱 많이 배출됐다고 생각했다. 그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새로운 인텔리의 의견이 지배적인 것으로 되면서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종말로 이어질 것이며, 이는 조합주의(coportatism) 또는 노골적인 사회주의로 대체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에 붕괴한 것은 사회주의였다. 게다가 오늘날 좌파 정당은 실제로 지식인들이 지배하고 있으며, 전통적인 노동자 계급의 지지를 잃고 있다. 새로운 엘리트에 대한 슘페터의 생각은 옳았지만, 현실은 그가 상상했던 것과는 달랐다. 포퓰리즘의 부상은 정치적 극단을 향한 움직임을 나타낸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오랫동안 정통적인 정책들이 대다수 국민에게 안정적인 번영을 제공하지 못한 채 실패했고 금융위기로 충격이 발생한 데 따른 결과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새로운 차원에서 드러난 정치적 분쟁의 표현이기도 하다. 정체성은 경제 정책에 비해서 정상적인 정치적 거래가 쉽지 않다. 정체성과 주권은 실존적 문제다. 영국의 브렉시트 문제, 미국의 이민 및 시민권 문제, 유럽의 이민 문제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Chapter 06 포퓰리즘의 위험」중에서
부와 권력은 일상생활에서 많은 이점을 가져다준다. 하지만 정치 및 법률 시스템 내에서 더 노골적인 특권을 형성하기도 한다. 민주주의는 시민으로서의 평등한 지위, 아테네인들이 말하는 ‘이소노미아’, 즉 법 앞에서의 평등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이런 특권은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민주주의 정치 시스템에 대한 가장 명백한 위협은 정치와 정의를 모두 돈으로 사서 법을 만들고 법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사람이나 기관인 ‘전능한 주체’ 가 미치는 위협이다. 그들은 사법부를 부패시킴으로써 법 위에 군림할 수 있으며, 치외법권 지대로 도피하여 법을 우회할 수 있다. 어느 순간 이런 정치는 노골적인 금권주의로 변질될 것이며, 모든 실효적 권력이 다수가 아닌 소수의 손에 쥐여지게 될 것이다. 미국은 이미 거의 그런 지경에 이르렀다. 다른 민주주의 국가들도 금권주의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선동가가 대중의 분노에 편승하여 고위직에 오르거나 금권주의자 중 한 명이 스스로 그 자리를 장악하면서 종종 금권주의가 독재로 이어진다. 2020년 대통령 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시도한 쿠데타는 거의 성공할 뻔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Chapter 08 ‘뉴’ 뉴딜을 향해서」중에서
안정적인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국가들의 동맹은 21세기 민주주의를 건강하게 하기 위한 필수 요건이다. 현재 세계에는 많은 나라가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 국가이거나, 권위주의 국가이거나, 심지어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독재 국가에 속한다. 이런 세계에서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국가들의 동맹은 이념적 · 경제적 · 기술적 · 군사적으로 서로를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민주주의 국가들은 자국의 안보와 번영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리고 다른 국가들과의 거래를 관리하기 위해 상호 간에 동맹이 필요하며, 그런 동맹이 규정하는 법 · 규제 · 제도로 이루어진 그물망이 필요하다. 그러나 번영, 평화, 공유지 보호라는 글로벌 공공재를 확보하려면 비민주적 국가들, 특히 중국과 심지어는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가 해결된 이후의 러시아와도 어느 정도 협력이 필수적이다. 우리는 푸틴과는 영원히 협력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푸틴은 영원하지 않을 것이다.
---「Chapter 10 세계의 민주주의적 자본주의」중에서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취약한 결합은 개인과 공동체,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자유와 책임, 경제와 정치, 돈과 윤리, 엘리트와 민중, 시민권자와 비시민권자, 국가와 세계 사이에서 쉽지 않은 균형을 유지할 것을 요구한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의 모토가 ‘메덴 아간(무엇이든 과해서는 안 된다)’인 이유다. 이런 균형이 잘 맞을 때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와 시장 자본주의의 결합은 세계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체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는 엘리트들의 이기심과 독재자의 야망에 취약하다. 역사적으로 민주공화국들은 예외에 속했다. 인류의 일반적인 정치 패턴은 전제정이거나 폭정이었다. 후자는 항상 옆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는데, 오늘날의 세계에서는 선동적이고 관료주의적인 폭정이 기회만 엿보는 것이 아니라 줄을 지어 행진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서 있는 토대 위에서 노력해야 한다.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다. 20세기 중반의 세계는 좋든 나쁘든 영원히 사라졌다. 우리는 ‘더 나은 재건’을 해야 한다. 앞으로 나아갈 길은 과거 개혁가들의 목표를 현재의 필요에 맞게 조정하는 것이다.
---「결론」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