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엔 종종 소파와 한 몸이 되어 로맨스 판타지를 읽는다. 나만의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라 생각해 누구와 감상을 나눠본 일은 없다. 근데, 저자가 옆구리를 쿡쿡 찌른다. 요즘 뭐 읽는데? 같이 얘기해 볼까? ‘길티’할 이유, 없잖아!
이 세상의 차고 넘치는 이야기 가운데 나(우리)는 왜 지금 로맨스 판타지에 빠져 있을까? 그 이유를 추적해가는 경험은 꽤나 흥미롭다. 나는 지금 누구를 만나 어떤 사랑을 하고 싶은지, 내가 바라는 삶의 형태와 대우는 무언지, 그리하여 나란 과연 어떤 인간인지. 저자는 로맨스 판타지의 생명력이란 “여성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나아가 아무런 조건 없이 이를 응원하는” 데서 나온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나는 동시대 여성들과 이야기를 통해 만나고, 공감하고, 함께 다독이는 중이었구나… ‘길티함’을 던져버릴 용기가 생긴다.
‘내가 로판 좀 읽지’ 하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무조건이다. 그동안 수많은 밤을 꿀꺽 삼켜버린 그 이야기들을 다시 꺼내 읽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솟아오를 것이다. ‘피폐물’, ‘힐링물’이 대체 무엇인고, 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환영이다. 지금부터 인생에 커다란 재미 하나를 추가하게 될 테니까.
무엇보다 읽고 싶은 작품을 잔뜩 발견해 든든할 뿐이다. 고전적인 ‘북부대공파’이지만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조신남’에게도 애정을 나눠줘 볼까 싶다. ‘취향 저격’일 것이 분명한 『그 오토메 게임의 배드엔딩』부터 시작할까, 결말이 너무나 궁금한 『계모인데 딸이 너무 귀여워』부터인가, 결국 다 읽을 거면서 즐거운 고민에 빠져 있다.
- 이영희 (『어쩌다 어른』, 『안녕, 나의 순정』 저자)
욕망할 만한 사랑, 적절한 관계에 대한 규범은 사회 구성원 간의 끊임없는 곁눈질과 느슨한 합의를 거치며 이동한다. 페미니즘 리부트는 사랑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남성이 위협적이거나, 신뢰할 수 없거나, 권력 차를 상기시키는 기호로 변화한 이상 이성과의 ‘가장 친밀하고 안락한 관계’라는 신화도 심문에 부쳐져야 했던 것이다. 당장은 데이트폭력과 안전이별을 경계하고, 미래에는 돌봄노동과 경력단절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랑은 자꾸만 낭만으로부터 멀어진다. 아녀자의 한낱 공상이라는 식으로 멸시당해 왔던 로맨스적 상상력은 이제 현실을 충분히 각성하지 못한 여자들의 한가한 소리로 취급되는 듯도 하다. 그러나 현실이 거북하다고 욕망까지 단념할 수 있을까. 문학 연구자인 저자가 로맨스 판타지 웹소설을 탐독하며 관찰하고 질문한 바를 여성주의적 관점으로 풀어 쓴 책, 『어느 날 로맨스 판타지를 읽기 시작했다』는 분명히 존재하는 욕망의 분출구로서 로맨스 장르의 기능을 긍정한다.
이 책에는 흥미롭게 읽을거리가 많다. 로맨스 판타지를 향해 우회하고 돌진하는 동시대 여성의 욕구를 분석하면서도, 고전이나 근대문학과 견주어 가며 텍스트에 관한 통시적 이해도 제공하기 때문이다. 웹툰이나 웹소설의 경향을 분석하다 보면 그 새로움에 몰두하느라 과거와의 지나친 단절을 시도하는 실수를 저지르기 쉽다. 그와 달리 이 책에서 로맨스 판타지는 서사 예술의 연속성 위에서 발견된다. 로맨스, 판타지, 웹소설이라는 이유로 본격적인 평론의 기회를 누리기 어려운 장르의 위치를 생각하면 이 책이 가지는 의의는 분명하다.
환상적이면서도 세속적인 이 여자들의 놀이터를 한번 들여다보자. 현시대 여성 소비자를 상대로 ‘팔리는’ 이성애 로맨스를 쓰기란 만만한 일이 아니고, 그래서 로맨스 판타지 웹소설은 최상의 정치적 올바름을 구현하지는 않을지언정 때때로 놀랍도록 솔직해진다. 이 장르가 순응하는 바, 극복하려는 바조차도 지금 한국 여성의 욕망이 어디쯤 서 있는지를 가리키는 지표인지 모를 일이다.
- 탱알 (『다 된 만화에 페미니즘 끼얹기』 저자)
로맨스는 오랜 기간 여성들의 세계였다. 여성의 것은 폄하되기 마련이다. 흔히 ‘할리퀸’이라 여겨지는 로맨스는 주부가 부엌 테이블에서 ‘갈겨’ 쓴 것이라며 전문성, 예술성도 없고, 진지하게 쓰이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다. 게다가 장르소설, 대중소설은 그 자체로 평가 절하되며 진지한 읽기의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어느 날 로맨스 판타지를 읽기 시작했다』는 ‘어느 날’, 하지만 언제나 우리 옆에 있었던 ‘로맨스/판타지’를 다시 들여다볼 것을 권한다. 앞서 로맨스가 받았던 전문성, 예술성이 없다는 비난과 등단의 문턱이 낮다는 웹소설의 특징은 바꿔 말하자면 로맨스 판타지의 화자가 바로 ‘보통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보통 사람’들의 욕망과 희망은 바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또 다른 ‘보통 사람’인 우리와 공명한다. 이 책은 평범한 사람들이 장르의 문법으로 직조해낸 글귀 속에 스며든 삶과 고민을 읽어낸다. 행복과 고통, 상처와 치유, 구조 안에서의 개인과 변화한 현실의 인식, 그리고 변화의 시도까지 읽어낼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한다. 물론, 왜 우리가 ‘로판’을 보는지도 포함해서 말이다.
- 김휘빈 (『마리아의 아리아』, 『웹소설 작가 서바이벌 가이드』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