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종말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서구 작가들의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 동유럽이나 라틴아메리카 작가들에게 이러한 말을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나 다름없다. 책꽂이에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을 꽂아놓고 어떻게 소설의 죽음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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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꼰도 사람들이 기억력이 회복된 것을 축하하는 사이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와 멜키아데스는 옛 우정의 먼지를 털어내고 있었다. 집시는 마을에 머물 예정이었다. 그는 정말로 죽어 있는 몸이었지만 외로움을 참을 수 없어 돌아왔던 것이다. 삶에 충실했다는 벌로 모든 초자연적인 능력을 빼앗기고 같은 종족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한 그는 아직 죽음의 손길이 미치치 않은 이 세계의 한쪽 구석에 몸을 숨긴 채 은판 사진술 개발에 헌신하겠다고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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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두 연인은 만년의 시간들, 무자비하게 흘러만 가는 불길한 시간들의 흐름을 거스르며 항해하고 있었는데, 그 시간들은 두 연인을 환멸과 망각의 사막으로 끌어내기 위해 쓸데없이 애를쓰는 데 소비되고 있었다. 그와 같은 시간의 위협을 알게 된 아우렐리아노와 아마란따 우르술라는 무절제한 간통으로 배태된 아이를 세상에서 충실한 사랑으로 맞이하고자 서로의 손을 마주잡고 최후의 몇 달을 보냈다. 밤에 침대에서 서로 포옹을 하고 있으면, 달빛 아래에 있던 개미들이 시끄럽게 설쳐대는 소리도, 좀벌레들이 시끄럽게 사각거리는 소리도, 옆 방들에서 잡초들이 자라나는 지속적이고 선명한 바스락 소리도 그들을 겁주지 못했다.
--- p.297-298
건강이 회복되어 가느라 머릿속이 아른아른할 때,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레메디오스의 먼지낀 인형들에 둘러싸여 그 시들을 읽음으로써 삶의 결정적인 순간들을 회고했다. 그는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장래성 없는 전쟁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죽음의 언저리에까지 이르렀던 자신의 경험들을 여러시간에 걸쳐 운문속에 녹여냈다. 그러면 그의 생각은 아주 명쾌해졌고, 생각들을 여러 가지 각도에서 검증할 수 있었다. 어느 날 밤, 그가 헤리넬도 마르께스 대령에게 물었다.
'친구, 한 가지만 얘기해 주게, 자넨 왜 전쟁을 하고 있는가?'
'왜라니, 친구. 위대한 자유당을 위해서지'
헤리넬도 마르께스 대령이 대답했다.
'그걸 알다니 자넨 행복한 사람이군. 난 말이야, 자존심 때문에 싸우고 있다는 걸 이제야 겨우 깨닫게 되었네' 그가 말했다.
'그것 참 안 됐군' 헤리넬도 마르께스 대령이 말했다.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친구의 놀란 표정이 재미있었다.
'그래, 하지만 어찌 됐든, 왜 싸우는지 모르는 것 보다야 더 낫지'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이 말했다. 그는 친구를 쳐다보다가 미소를 머금으며 덧붙였다. '또 말이야, 자네처럼 그 누구에게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그 무엇을 위해 싸우는 것보단 낫지'
--- p.205 : 6--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