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수 없이 친일파 대신들은 순종 황제의 서명이나 대한제국의 국새를 대신해 행정 업무에 사용하는 ‘칙명지보’라는 옥새를 찍기로 했다. 이를 눈치챈 순종 황제의 황후 순정효황후 윤씨는 몰래 칙명지보 옥새를 빼내와 치마폭에 숨겼다. 친일 각료 대신들이 당황하자 경술국적 10인 중 한 명인 시종원경 윤덕영이 순정효황후 윤씨의 치마를 강제로 들춰내고 옥새를 빼앗았다. 이런 회한을 안고 결국 조약문에 도장이 찍혔다. 순종 황제의 서명이나 대한제국의 국새를 대신해 칙명지보 옥새가 날인된 한일병합 조약은 이처럼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없다.(이후 조약문에 순종 황제의 서명이 적혔으나 이는 일제가 위조한 서명일 뿐이다.)
---「그날의 치욕, 경술국치」중에서
신민회의 주 활동지는 평안도였으며 평안도 내에서도 가톨릭 신자들이 상당수였다. 1911년 헌병대가 평안도에서 가톨릭 신자들을 체포했는데, 대부분이 신민회 간부들이었다. 체포 죄목은 암살 미수였다. 평안도의 민족 가톨릭 신자들이 압록강 철교 준공식에 참여한 데라우치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민회는 데라우치 암살 계획을 세운 바 없었다. 데라우치 암살 미수 사건은 민족운동가들을 체포하기 위해 헌병대와 총독부가 꾸민 자작극이었다. 총독부는 총 600여 명을 검거하고 모두에게 모진 고문을 가한 뒤 128명을 기소했는데, 그중 105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를 ‘105인 사건’이라 불렀고, 이 사건으로 신민회는 해체되었다.
---「105인 사건」중에서
이 거국적 운동이 왜 일제에 강제 병합되고 10년이 지난 1919년에 이르러서야 일어났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3.1운동이 거국적인 움직임으로 확대될 수 있었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일제가 식민지 조선인들의 공공의 적이었기 때문이다. 국권 피탈 10년간 조선인들은 계층, 재산, 성별, 직업, 계급 등을 막론하고 피지배 식민 백성들이라는 이유만으로 탄압받으며 생존권을 위협받았다. 1910년에서 1918년까지 무려 9년에 걸친 조선총독부의 토지 조사 사업으로 땅을 빼앗기기도 하고, 자영농은 몰락하고, 소작농도 방랑해야만 했다. 조선인 노동자에게 열악한 노동 환경과 저임금이 강요되고 복지 차별은 노골적이었다. 1910년 회사령 발표로 자산가들이라 해도 재산을 온전하게 보존 운영할 수 없었다. 온갖 조치령으로 조선의 경제권은 침탈당했다. 재산의 많고 적음을 떠나 식민지 조선인 모두가 식민 지배에 시달렸다.
---「3.1운동의 원인과 의의」중에서
청산리 대첩 패전 후 조선인과 독립군 부대를 향한 일제의 보복심은 광기를 불러일으켰다. 일제는 봉오동 전투에서 패배한 뒤 훈춘 사건을 일으키고, 이를 빌미로 만주에 군대를 상주시켰다. 청산리 대첩 이후 일제는 훨씬 더 잔혹해졌다. 1920년 10월 9일부터 11월 5일까지 간도 지역에서 27일간 일어난 만주 주둔 일본군의 민간인 무차별 학살을 ‘간도참변’, 혹은 ‘경신참변’이라 한다. 당시 약 3,400명 정도의 조선인이 희생당했다고 집계됐지만, 실제 사상자는 훨씬 많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살해당하지 않더라도 강간, 약탈, 방화 등 비인륜적 행위가 도처에서 벌어졌다.
---「간도참변」중에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누구나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교육 제도를 잘 갖춘 나라일수록 국력이 강했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으로 정복자가 피정복민을 효과적으로 통치하는 방법은 그들에게 교육 기회를 제한하고 박탈하는 것이다. 일본이 선진화된 교육 체계를 신속하게 정비했던 것에 비해, 강점 직전 조선 백성은 물론 지배층마저도 국제 정세와 신문물에 대해 무지했고 무관심했다.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은 일제의 지배를 받게 된 원인 중 하나가 낙후된 교육이라고 생각했다. 3.1운동 이후 독립운동가 중 일부는 투쟁으로 독립을 쟁취하는 것보다 조선인 한 명 한 명이 유능해지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이념과 운동을 ‘실력 양성 운동’이라고 한다. 이 운동에는 두 가지 흐름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교육 운동이었다.
---「실력 양성 운동」중에서
1932년 1월 이봉창의 의거에 이은 1932년 4월 윤봉길의 의거로 한반도는 물론 중국인들까지 충격에 빠졌다.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는 윤봉길을 일컬어 “2억만 중국인도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인 1명이 해냈다.”라며 그를 극찬했고 ‘역사상 가장 장렬한 사람’이라는 뜻의 ‘장렬천추(壯烈千秋)’란 휘호를 유족에게 전달해 주었다. 장제스는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적극 후원하기로 하였고 국제 정상들이 모이는 카이로 회담에서 적극적으로 한국의 독립을 논의했다. 또한 미주, 하와이, 멕시코, 쿠바 등의 한인 교포들이 임시정부에 후원을 보내오기 시작하면서 임시정부엔 막대한 재정이 쌓이게 되었다.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는 동아시아를 흔들었으며 적어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변곡점을 만들어냈다.
---「이봉창 의거, 윤봉길 의거」중에서
일제는 조선을 더 강압적으로 수탈하기 위해 통치 방식을 바꾸기로 했다. 조선인을 세뇌하여 민족성을 완전히 멸각해 버리기로 한 것이다. 1930년대 들어 조선총독부는 문화 통치기를 끝내고, 민족 말살 정책을 시행했다. 1938년 조선총독부는 3차 조선교육령을 발표해 기존에 필수 과목이던 조선어를 선택 과목으로 바꾸었다. 곧이어 1943년에는 4차 조선교육령으로 조선어 사용을 전면 금지했다. 아울러 모든 교육 과정은 전쟁 수행 교육 중심으로 개편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어린아이부터 세뇌할 요량으로 기존의 ‘소학교’라고 부르던 초등 교육 기관을 ‘황국신민의 학교’를 줄여 ‘국민학교’로 바꾸었다.
---「조선어 금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