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 가공할 만하고 무도 막심한 외교 칙서였다. 칙서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내리는 문서가 아닌가. 고종 황제는 분심을 누를 수가 없어 밤새 잠을 못 이루었다. 이튿날 이토가 다시 고종황제를 알현하였다. "황제 폐하, 어떠십니까? 이제 납득을 하셨습니까?" "이토 공작, 짐은 무슨 뜻인지 정히 모르겠소. 우리의 외교권을 귀국이 대신한다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요? 한 나라의 외교권을 어찌 타국이 마음대로 한단 말이오. 그리고 이처럼 중대한 일을 어찌 나보고 혼자 결정을 하라는 것이오. 우리에게는 엄연히 문무백관이 있고, 각 부처를 책임지는 대신이 있소. 또 우리에게는 책임지고 다스려야 할 이천만 백성이 있소." 이토의 살기 등등한 협박에도 고종황제는 분명히 말했다. "황제 폐하, 폐하께서 이렇게 나오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대한 제국은 전제 군주국이 아니던가요? 폐하의 한 말씀에 문무백관이 다 따라오는 것이 아닙니까? 더욱이 폐하께서 백성 운운하는 것은 당치도 않습니다. 우리 일본은 어디까지나 동양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연약한 이웃나라를 도와 주겠다는 것 뿐입니다." "듣기 싫소. 공작은 말끝마다 동양 평화를 들먹이는데, 동양 평화를 지킨다는 것이 그래 남의 나라 외교권을 박탈하고 내정을 간섭하는 것이오." 고종황제는 강경하게 이토를 힐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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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여름 안중근은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기사를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개최된 세계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전 의정부 참관 이상설, 전 평리원 검사 이준, 이범진의 둘째 아들이며 전 러시아 공사관 참사관 이위종 등이 고종 황제의 밀사로 비밀리에 파견되었으나, 이미 을사조약에서 외교권을 일본에게 빼앗겼기 때문에 일본인의 방해로 회의장에도 못 들어가고 무산되었다고 했다. 게다가 이준은 분통이 나서 헤이그 여관 방에서 분사했다는 것이 아닌가? "이럴 수가‥‥." 신문을 읽어가던 안중근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가뜩이나 민족의 주권 의식에 고뇌하고 있던 안중근은 그 보도를 보자 온몸이 떨렸다. 일본은 헤이그 밀사 사건은 고종 황제가 지시한 것이며 그것은 일본과 통감부를 무시한 처사라고 트집을 잡았다. 이토는 대단히 노해 고종 황제를 문책하고 그 책임으로 왕위를 아들에게 양위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지난해 진남포에 와서 민족 정신을 열띠게 환기시켜 주던 이준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말끝마다 조선의 황실을 안전케 한다는 일본이 끝내는 이렇게 나오다니‥‥" 삼흥 학교 교사들은 수업을 중단했다. "이건 전국적으로 이천만이 일어서야 할 사건입니다." 학생들도 서울로 가겠다고 분연히 일어섰다. "모두가 서울로 상경해서 시위를 하면 좋겠지만, 서울의 사태를 정확히 알기 위해선 안 선생이 미리 다녀오시면 어떻겠소. 신문 보도만 가지고는 답답한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니오." "알겠소. 내 급히 상경하여 사태가 어떠한지 보고 오리다." 안중근은 서울 갈 준비를 하면서 내방으로 들어섰다. 어머니에게 고종의 폐위를 알리자니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어차피 알려질 것이기에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사정을 말씀드렸다. "어쩌자고 일이 이렇게 되도록 모르고 있었더냐?" "조정의 대신이라는 것이 모두 매국노들이니 그들의 짓이 아니겠습니까? 가서 사정을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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