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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고 온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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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고 온 시

고은 | 창비 | 2002년 01월 31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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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02년 01월 31일
쪽수, 무게, 크기 166쪽 | 256g | 125*200*20mm
ISBN13 978893642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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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 넘어 일장춘몽이었다. 2001년이었는데 곧 2002년이다. 그럼에도 올해는 지난해의 내년이었고 내년의 지난해 아니겠는가. 그렇게 올해 속의 다른 해들과 함께 시가 있다.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서정시가 있어야 하는가라고 누가 처절히 외친 적이 있다. 최근의 아프간사태에 이르기까지의 경악 가운데서도 누군가가 시의 존재이유를 물어야 했다.
그 질문이 바로 시를 지속가능케 하는 것인가.
우리에게, 분단 50년을 넘어선 한반도의 고된 삶에서도 시의 심장 좌심방은 역력히 살아왔다. 시는 이렇게 언제까지나 산 자의 아날로그일 것이다.
모국어로서의 시, 뭇 국어들의 시 그리고 자연언어의 시와 어쩌면 놓쳐버리기 쉬운 우주 방언으로서의 시의 의미는 더 깊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지금 지구상에는 3950종 이상의 언어가 남아 있다. 이것들이 시의 세계를 이루는 생명의 기호인 것이다. 그런데 앞으로 백년이 지나면 지구상의 언어 절반 내지 90퍼센트가 사라진다는 예측이 있다. 그 원인은 세계화에 의한 언어 전체주의 때문이고 사이버미디어 때문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나의 모국어를 한밤중에 애틋하게 사모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후기의 한 시편에서 ‘무추(無秋)’라는 표현을 본 적이 있다. 가물어 가을걷이가 없다는 뜻이었다.
이 시집으로 나도 그런 ‘무추’를 조금 면한 셈인가. 시집 이름을 ‘두고 온 시’로 정한 것은 같은 이름의 시 한 편 때문이었는데 한원균의 강한 권유가 있었다.
지난해 절반 이상을 여러나라 시 축제에 불려다니느라고 오붓이 상머리에 앉아 마음을 가다듬을 겨를이 퍽 없었다. 그런 중에도 시에 대한 몇가지 생각은 늘 달라붙었다. 특히 베로나에서의 유네스코 세계 시 아카데미 창립대회와 관련해서 새삼 시의 행로를 운명의 척도로 찾아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시의 자리가 세상의 해일로 자꾸 묻혀버리는 시절이 도리어 시의 진정한 얼굴이 떠오르는 시절이고 싶은 것이다. 위기 또는 절망 그런 것으로 하여금 시의 화생설화(化生說話)가 있어온 사실을 가만히 기억해낼 필요가 있다.

제1부는 나라 안의 여러 지점에서 얻어진 표상의 내재화가 어느 만큼 눈에 띌 터이고, 나라 밖의 도처에서 삶의 정체성을 돌아보는 흔적도 함께 있다. 그래서 순례라는 이름을 달아주었다. 제2부는 지난해의 시집 『순간의 꽃』에 이어지는 작은 시 50여 수를 모았다. 나를 ‘지구 저편의 형제시인’이라고 말하는 개리 스나이더는 이런 작은 시 작업을 격려하면서 고대 그리스 경구시와 근세 일본의 하이꾸와는 또 다른 시 형식이라고 말했다.
또한 나 자신도 굳이 이 작은 시편들을 선가(禪家)의 게송과도 일정한 차이를 두고 싶은 것이다. 형식이되 자유인 것, 그래서 형식이 촛농처럼 녹아내려야 촛불이 환해질 것이다.
나는 서사의 진행에 한없이 홀려 있거나 서정의 확대에 기울어지는 일 아니고도 이런 작은 시의 현재를 늘 체험하고자 한다. 교정과정에서 분량이 넘치는 제3부는 다음 기회로 미루어버렸다. 주로 북한방문과 관련된 시편들이다.

창작과비평사의 고형렬, 유용민에게 감사한다. 초고와 별반 다르지 않는 원고를 챙겨 교정쇄로 만들어 주었다. 그들의 정성에 대해서 나는 낚싯줄도 없는 낚싯대를 내려놓고 있는 엉터리인가 싶었다.
--- 2002년 1월 안성에서 고은
고개 넘어 일장춘몽이었다. 2001년이었는데 곧 2002년이다. 그럼에도 올해는 지난해의 내년이었고 내년의 지난해 아니겠는가. 그렇게 올해 속의 다른 해들과 함께 시가 있다.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서정시가 있어야 하는가라고 누가 처절히 외친 적이 있다. 최근의 아프간사태에 이르기까지의 경악 가운데서도 누군가가 시의 존재이유를 물어야 했다.
그 질문이 바로 시를 지속가능케 하는 것인가.
우리에게, 분단 50년을 넘어선 한반도의 고된 삶에서도 시의 심장 좌심방은 역력히 살아왔다. 시는 이렇게 언제까지나 산 자의 아날로그일 것이다.
모국어로서의 시, 뭇 국어들의 시 그리고 자연언어의 시와 어쩌면 놓쳐버리기 쉬운 우주 방언으로서의 시의 의미는 더 깊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고은 시인의 눈에는 우리 모두가 “끝없이 계승되는 시속의 시 한편 한편”이다. 삼라만상을 다 시로 보는 시인의 눈에 아름답고 신비롭지 않은 것이 있을 리 없고, 시가 죽거나 사라질 리가 없다. 고은 시인이 늙어가지 않고 오히려 나날이 젊어지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사실, 이 세상 모든 것과 우리 모두의 삶을 다 시로 파악하는 시인이야말로 진정한 시인이 아니겠는가? 글과 삶이 일치하지 않고 따로 돌아가는 시대에, 고은 시인은 시를 온몸으로 살고 있어, 그 자신이 곧 시가 되는 특이한 시인이다. 고은 시인을 갖고 있다는 것은 한국문단의 경사이자, 한국사회의 축복이다. 자신의 온기로 북해의 얼음을 녹이고, 주위를 따뜻하게 감싸주는 난류와 같은 시인, 또 휴대폰으로 늘 연결이 되는, 그래서 인간교류를 몸소 실천하는 열린 시인, 그리고 모두가 잠든 밤에 홀로 깨어 시대의 어둠을 밝히고 문학의 미래를 인도하는 안내성좌─바로 그것이 시인 고은의 참 모습이자, 이 어두운 시대에 우리가 그를 필요로 하는 절실한 이유이다.

--- 김성곤 (문학평론가, 서울대 영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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