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 인간처럼 사람들의 시선 밖으로 사라진 듯한 느낌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십 대 여학생이라면 대부분 이러한 느낌에 공감할 것이다. 바로 나, 케미 모건도 그렇다. 그런 면에서 나는 카멜레온을 닮았다. 다행히도 우리 학교에서는 카멜레온 같은 기질을 멋진 능력으로 평가해 주니, 나는 또래의 다른 아이들보다 운이 좋은 셈이다.
나는 스파이 학교에 다닌다.
물론 정확히 말하자면, ‘우수 여학생을 위한 갤러허 아카데미’는 스파이 학교가 아니라 영재 학교다. 학교에서는 학교의 이름을 빛내 줄 만한 직업이라면 무엇이든 자유롭게 선택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러면서 고급 암호 해독법과 14개국 언어를 가르친다면, 담배 회사가 어린아이들에게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을까? 물론 갤러허의 학생들은 그 말이 그저 대외적인 입장일 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심지어 갤러허의 교장인 우리 엄마조차도 내가 ‘스파이 학교’라고 표현해도 굳이 고쳐 주려고 하지 않는다. 물론 엄마도 전직 스파이였다. 내가 첫 번째 비밀 작전 보고서인 이 글을 통해, 지난 학기에 일어났던 일을 적어 보기로 한 것도 엄마의 아이디어였다. 엄마는 입버릇처럼 말한다. 스파이의 삶에서 가장 힘든 부분은 위험을 감수하는 게 아니라, 보고서를 쓰는 거라고. 나는 그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만일 내가 미사일 탄두가 숨겨진 모자 상자를 들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이스탄불을 출발하는 비행기에 타게 된다면, 그때 가장 하기 싫은 일은 보고서 쓰기일 테니까. 그래서 연습 삼아 이 글을 써 보려고 한다.
만약 당신이 네 단계가 넘는 신원 확인을 통과했다면, 아마도 100년 넘은 역사를 가진 우리 갤러허의 여학생들에 대한 정보를 속속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저 평범한 사람이라면, 우리를 스파이 영화에 나오는 환상을 좇는 철없는 여자아이들 정도로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우리 학교 담장 옆을 지날 때, 웅장한 고급 건물과 완벽하게 손질된 정원을 들여다보면서 이곳은 할 일 없이 무료한 상속녀들을 위한 오만한 기숙사 학교일 거라고 어림짐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전혀 개의치 않는다. 지난 9월에 학생들이 타고 온 리무진들이 학교 앞에 긴 행렬을 이루었을 때, 버지니아 로즈빌의 주민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도 바로 그 짐작 덕분일 테니 말이다. 그때 나는 학교 건물 3층의 창턱에 앉아, 담요처럼 깔려 있는 키 작은 나무들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자가용들이 높이 솟은 철제 대문을 통해 들어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굽이진 언덕을 따라 800미터나 이어진 진입로는 마치 도로시가 걸어가던 노란 벽돌 길처럼 평화로워 보여서 위험의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그곳에 타이어 자국을 읽는 레이저 광선과 폭발물 감지기가 설치되어 있으며, 한 구획은 바닥 전체가 한꺼번에 열려서 트럭을 통째로 삼킬 수 있다고 누가 상상할 수 있겠는가!
책속으로 116-118p
나는 놀라서 병을 길바닥에 떨어뜨렸다. 병은 깨지지 않고 차도 쪽으로 굴러갔다. 재빠른 동작으로 병을 집으려고 다가갔으나, 다른 손이 먼저 병을 잡았다. 한눈에 보아도 남자의 손임을 알 수 있는 큼직한 손이었다. 그 순간 얼굴이 살짝 달아오르면서 짜릿한 느낌이 없었다고 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 느낌은 핍스 박사의 임시 지문 수정 크림을 발랐을 때 느꼈던 것과 비슷했는데, 물론 그보다는 훨씬 좋았다.
내가 몸을 일으키자, 그 아이가 병을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 들었다.
“안녕?”
헐렁한 바지에 한 손을 집어넣은 채 그 아이가 말했다. 주머니에 넣은 손으로 바지를 잔뜩 내리누르고 있어서 바지가 곧 엉덩이를 벗어나 나이키 신발 위로 흘러내릴 것 같았다. 나이키 신발은 너무 하얗고 깨끗해서 한눈에 보아도 개학날 처음 신고 등교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여기 자주 오니?”
그 아이는 질문이 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약간은 움찔거리며 물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냥 대답하지 않아도 돼. 이 마을에 있는 쓰레기통들 중에서 이게 그나마 내용물이 실속 있긴 해. 하지만 너 같은 아이가 뒤질 정도는 아니거든.”
이 대목에서 나는 해명을 하려고 했으나, 그 아이가 말을 계속했다.
“7번가에 있는 쓰레기통 있지, 그건 뒤질 만할 거야.”
그 순간 솔로몬 선생님이 첫 수업에서 한 말이 생각났다. 그래서 난 그 남자아이의 모든 것을 세밀하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키는 178센티미터 정도 되어 보였고 구불구불한 갈색 머리에, 솔로몬 선생님도 기가 죽을 만큼 매력적인 눈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너무도 자연스럽고 편안한 미소였다. 얼굴 전체, 눈, 입술, 그리고 양 볼이 그 미소를 만들어 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치아를 지나치게 드러내거나 의도적으로 지어 보이는 미소가 아니라 마치 버터가 녹는 것처럼 편안하고 부드러웠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이런 일에 있어서 내 판단 기준은 그리 믿을 만한 게 못 되었다. 그 아이가 나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었으니 더더욱 말이다.
“그냥 평범한 병이 아닌가 보구나.”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그 아이가 말했다.
순간 나는 내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웠을까 생각했다. 그 아이의 따듯한 미소 앞에서 나는 작전도, 임무도, 모두 잊어버린 채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그대로 말해 버렸다.
“고양이를 키우거든!”
그 아이가 눈썹을 위로 치켜세웠다. 나는 그 아이가 전화기를 꺼내 들고 가까운 정신 병원에 전화해서 여기 로즈빌에 도망 나온 환자 하나가 있다고 신고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고양이가 병 가지고 노는 걸 좋아하거든.”
나는 빠르고 장황하게 이야기를 이어 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딱 하나 남은 병이 깨져서 고양이 발바닥에 유리 조각이 박혔어. 수지! 이름은 수지야. 발바닥에 유리 조각이 박힌 고양이 말이야. 고양이를 여러 마리 기르는 건 아니고, 한 마리를 기르는데, 그 고양이 이름이 수지야. 그래서 이 병이 필요했던 거야. 사실 고양이가 또다시 병을 가지고 놀고 싶어 할지는 모르겠어. 왜냐하면…….”
“발바닥에 유리 조각이 박힌 게 충격이었을 테니까.”
그 아이가 마무리를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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