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서 말이 가진 그런 이론화, 로고스화 작용이 한층 강해지고 이중화된 것이 술어이고, 그런 의미에서 술어란 말 속의 말이 된다. 그리고 시대가 큰 전환기에 있을 때 세계를 독해하는 키워드로서 술어의 대규모 대체 또는 교체가 이루어진다. 일찍이 풍부한 의미로 빛났던 수많은 술어가, 정신을 차리고 보면 현저하게 그 빛과 의미를 잃고 그 대신 새로운 술어가 차례로 부상한다. 그중에는 새로 만들어진 것도 있지만, 옛날부터 있었다가 새로운 빛을 갖게 된 것도 있다.
일반적으로 정의를 내리는 일이란 의미를 한정하여 용어를 밝히는 것이며 개념을 분명히 하고 중의성을 없애려는 지향이다. 그러나 개념과 구별된 의미에서의 언어 수준이 문제가 될 때 개념을 분명히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그것과 함께 말로서 표현력을 갖는 것이 바람직하다. 표현에 의해 비로소 말은 그 본래의 동적 성격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레고리 베이트슨은 ‘놀이’란 ‘이건 놀이다’라는 메타 레벨의 커뮤니케이션을 포함한 행위라고 말했다. 이는 얼핏 아무것도 아닌 것, 간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상당히 고차적인 활동이다. 왜냐하면 ‘이건 놀이다’라는 메시지는 에피메니데스(Epimenides)의 역설 - 즉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다’라고 어떤 크레타인이 말했다” - 과 비슷한 진술의 자기모순성을 돌파하는 효과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그냥 순수하게 놀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객관화 또는 이화(異化)하는 눈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은 많은 어려운 문제를 포함한 문제인데도 일반적으로 ‘정상’과 ‘이상’의 구별만큼 간단히 생각되는 구별도 많지 않다. 간단히 생각된다기보다는 기꺼이 간단히 생각하려고 한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다. 간단히 생각하려고 하는 것은 자신의 몸을 정상 쪽에 두고 이상과의 사이에 확실한 선을 그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상한 것과의 구별에서 자기가 정상인 것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거기에 있는 것은 이상한 것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 및 그것들에 기초한 배제일 것이다.
정말로 가면=페르소나와 전혀 무관한, 진실한 얼굴 따위가 있을 리 없다. 진실한 얼굴이란 그것을 통해 인간끼리 내면적으로 서로 반응하고 마음이 통할 수 있는 풍부한 다양성을 가진 얼굴인 이상, 거기에는 이미 많은 가면=표정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기어츠의 ‘극장국가’론이 초래한 가장 중요한 의미는, 위에서 아래의 지배를 전제로 하는 권력 시스템이 아닌 국가의 틀이 있을 수 있는지, 만약 있다면 중추 권력을 갖지 않는 국가를 통합하는 작용을 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발리섬의 느가라를 예로 들어 구체적으로 보여준 점일 것이다. 역학=기계론 모델에 의한 근대 국가, 권력 국가에 기초한 국가의 통념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국가 모델로서 ‘극장국가’를 내세운 것일 것이다.
변증법이 언어의 논리이고 언술의 논리라는 것은, 그것이 한꺼번에 대상 전체 또는 진리를 파악하려는 것이 아니라 말을 쌓아 올려 - 즉 디스커시브하게 - 대상의 진리에 반복 접근해가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디스커시브(discursive)는 논증적, 또는 추론적이라고 번역되어 변증적(dialectic)과 대립되는 일도 있지만 그것은 제2차적, 파생적인 구별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차이의 적극적 평가는 차이의 산출로서의 반복, 나아가 기호의 적극적 평가에 이르지만, 이것은 결코 이유 없는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원래 차이에 대한 적극적인 주장은 현대 언어학의 시조라고 할 만한 소쉬르의 혁명적인 언명, “기호는 본질적으로 변별적이고” “언어(랑그) 안에 있는 것은 차이뿐이다”라는 말 안에서 이미 보였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말의 주고받음, 또는 상징적 상호 행위가 성가신 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말의 의미 작용이 다의적, 중층적일 뿐 아니라 마치 두 개의 맞거울이 한없이 상대를 비추는 것과 비슷한 일이 거기서 생기기 때문이다. 예컨대 “조그만 남자아이 P는 자신이 한 일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그 일에 대해 미안해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도록 어머니 O로부터 기대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또 하나의 다른 예는 “아내 O가 이제 남편에게 사랑을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을 남편 P는 알지 못한다고 아내 O가 생각하고 있다고 남편 P가 생각하고 있다.”
요컨대 전통적인 철학에서는 윤리적이라는 말과 이성적이라는 말이 동일시되었다. 이성에 따라 여러 가지 격정(파토스)을 제어하는 것이 윤리적이라고 여겨졌다. 윤리는 로고스를 말했고 파토스는 윤리에 반한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이런 관점은 전도되어야만 한다. 로고스란 의식의 객체적인 면이고, 그러는 한 주체성 자체인 윤리를 로고스와 결부시킬 수는 없다. 주체적인 의식은 로고스와 상반되는 파토스다.
분열병이 프로이트의 시야라기보다 관심 문제에 들기 힘들었던 사실에 대해서는 처음에 말했지만, 그 사실은 분열병이 프로이트 이론을 근저에서 위협하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은, 프로이트 이론의 핵심을 이루는 오이디푸스 상황, 즉 아버지와 어머니와 자식(특히 아들)이라는 근대 가족의 도식이 분열병의 문제를 생각함으로써 질문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다.
가와이 하야오(?원형으로서의 남녀노소?, 1982)도 지적한 것처럼 현재의 가정에서 생기는 끔찍한 사건은 그 옛날 신화 속에서 신들이 행한 드라마에 지나지 않는다.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죽인다. 이런 끔찍한 사건은 신화 속에 가득 차 있다. 심층심리학이 발견한 많은 콤플렉스에 오이디푸스, 다이애나, 카인 등 신화에 나오는 자들의 이름이 붙어 있는데, 이는 신화상의 인물들이 현재도 우리 인간의 심층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인간은 아주 복잡한 구조를 가진 생명 유기체이고 정신=신체적 존재다. 그러므로 그 기능에 고장이 나서 나빠진 몸 상태에 시달리는 일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고, 병은 늘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다만 오늘날 그와 다른 것은 예전처럼 병이 우리의 생활이나 경험의 일환이 아니게 되었고 오로지 의학적 치료의 대상이 된 일이다. 즉 병은 오로지 객관화할 수 있는 것, 추상적인 것으로 다루어지게 된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말 중에 “철학을 바보 취급할 것, 그것이 진실로 철학하는 일이다”라는 말이 있다. 파스칼의 ??팡세??에 나오는 말이다. 기성의 위엄 있는 ‘철학’을 제발 소중하게 껴안고만 있지 말고 내처 이화하고 ‘철학’과 관계없는 듯한 데서 문제를 찾으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지나친 아전인수일까. 그런 의미로까지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이 말에는 철학이 가져야 할, 자기에 대해 다시 묻는 면이 교묘하게 드러나 있다.
헤시오도스나 소피스트 이전에 올바른 담론이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거나 감동시키는 힘이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플라톤 이후에는 오로지 참인 개념을 나타내는 담론, 형식적으로 수미일관한 담론으로 바뀌었다. 즉, 담론은 그 독자성이나 고유성이라는 차원이 아니라 사상 내용의 단순한 표현으로서 인식된 것이다. 대체로 ‘진리에의 의지’는 진리를 욕망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실은 그것 자체가 욕망인 것이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