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충분히 느끼지 못한다는 느낌과 아무것도 아닌 일로 수선을 떠는 것 같은 느낌을 동시에 받았다. [……] 그것은 가해자도 없이 찾아오는 고통 같은 거였다. 모든 일은 내 몸 때문에, 아니 내가 한 선택 때문에 일어나고 있었다. 나는 스스로 어떻게 요구해야 할지 모르는 무언가를 세상에서 구하고 있었다. 사람들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데이브든, 의사든, 누구든 내 감정을 알아볼 수 있는 형태로 나에게 전해줄 사람들을. 그것이 구할 수 있거나 제공할 수 있는 최상의 공감이다. 보이는 것을 더욱 분명하게 다시 설명해주는 공감. --- p.36
“사람은 누구나 이중 국적을 가지고 태어난다. 건강의 나라와 병의 나라에 동시에 속한 시민으로서의 이중 국적이다.” 수전 손택은 그렇게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건강의 나라에 살다가 어쩔 수 없이 병의 나라에 거주하게 된다. 지금 켄드라는 두 나라 모두에서 살고 있다. 아직은 병에 완전히 포섭되지 않았다. 그녀는 오늘 밤 시내에서 친구랑 스시를 먹기로 했다고 한다. 그녀는 아직 자신을 이 병의 맥락에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있다. 평범한 일들을 하고, 평범한 삶의 사건을 기대하는 사람처럼. --- pp.72-73
니카라과에서 돌아와 나에게 있었던 일을 설명하려고 할 때마다, 마치 가장자리가 보이지 않는 정교한 퍼즐 조각들을 끊임없이 이리저리 맞춰보는 느낌이 들었다. 폭력, 우연성, 정체 모를 남자, 부은 얼굴, 현금, 관광객의 죄책감. 죄책감이란 항상 틀린 말처럼 느껴졌다. 그건 마치 일어난 일에 대해 내가 사과하려고 한다든지, 또는 어찌 됐든 관광객으로서의 내 위치가 그런 일을 당할 만했다고 말하려는 것과 같았다. 그 말이 적절하게 느껴지는 건 내가 무엇이든 변명하려 애쓰면서 사실상 내 안의 분노, 두려움, 내 일부가 제자리를 빠져나가는 징후를 찾아 거울을 보는 강박적 경향 같은 여러 부류의 찌꺼기와 뒤엉킨 어떤 유책성의 감정을 말할 때였다. --- p.136
취하지 않은 앤드리아는 자신의 책임을 이야기한다. 취한 앤드리아는 자신의 고난을 이야기한다. 그녀는 자기 삶을 구성하는 트라우마의 두 교점, 즉 늘 집을 비웠던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와 열네 살 때 당한 강간 사건에 대고 건배한다. 그녀는 술에 취하면 괴로워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믿는다. 이 쇼의 구성은 피해의식에 젖은 그녀의 이야기를 은연중에 승인한다. 어쨌거나 그 쇼는 들려줄 이야기가 필요하고, 앤드리아는 이야기를 빚어냈다. 인과관계라는 깔끔하고 만족스러운 은총으로 패턴화된 이야기, 강간당하고 침묵당하고 버려지고 술에 취하는 이야기. [……] 회복 중인 알코올 중독자들은 때로 다른 모든 사람에게 있는 인생 사용설명서가 자신에게는 없는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그 대신 주어진 명령들은 다음과 같다. 직장을 잃어라, 술에 취하라. 아이를 잃어라, 술꾼이 되라. 모든 것을 잃어라. --- p.144
사카린이란 두려움을 나타내는 가장 달콤한 단어다. 지나치게 감상적이고 지나치게 감미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 사카린이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암을 떠올린다. 몸속에서 응결되는 지나치게 많은 세포들. 사카린이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흔해빠진 표현으로 우리 마음에 자리 잡고 우리를 수치스럽게 해온 언어를 떠올린다. 값싼 효과를 노리면서 지나치게 많이 반복되고, 지겹도록 재활용된 말들. 지겹도록. 우리는 속이 메슥거릴 때까지 물리도록 달콤함을 포식한다. --- pp.189-190
전화로 찰리와 이야기를 나누는 건 더 이상했다. 일정 간격을 두고 제3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은 연방교정기관의 재소자와 통화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내가 해 질 녘에 트럼불 거리를 걷는 동안 그는 어딘가?작은 플라스틱 부스 안? 나는 그곳을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에 앉아 있었고, 전화를 끊은 뒤 내가 그 소도시의 가장 근사한 식당에서 송어 구이를 먹는 동안 그는 또다시 밤늦도록 책을 읽기 위해 이층 침대의 꼭대기로 향했다. 나는 우리가 과거 이야기를 쓸 때가 좋았다. 그것은 우리가 대등한 입장에 있었음을 뜻했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그에게는 나보다 많은 과거가 있었다. 그의 표현대로 그의 러닝셔츠 밑에는 더 많은 삶의 경험이 있었다. --- p.229
엘살바도르에서는 매일 밤 사람들이 트럭에 실려가서 죽임을 당하고 있었다. 그들의 시신이 쓰레기 매립장에 던져지는 동안 디디온은 한 줄로 진열된 수입 보드카를 바라보면서 생각하고 있었다, 뭐지? 그것들이 거기 있었기 때문에 그저 그것들을 가리키면서. 그것들이 무슨 권리가 있다고? 아이러니는 절망의 침묵보다 쉽지만 도피보다는 용감하다. 문제는 때로 당신이 몸짓을 해 보일 때 당신의 손가락이 떨린다는 것, 가리키는 몸짓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 그리고 어쩌면 당신은 어디도 가리킬 수 없다는 것이다. 아니 적어도 눈에 보이는 무언가를 가리킬 수 없다는 것이다. --- p.256
이것은 아들의 무덤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백인 쓰레기” 가족들의 이야기다. 이것은 이 비극으로 인해 사람들의 시야에 들어오게 되기 전까지는 스스로 투명인간이라 느끼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것은 입을 정장을 사거나 법정 대리인을 구할 돈이 없는 소년들의 이야기다. 그들은 국가가 그들에게 건네주는 것은 무엇이든 받으며, 앞으로도 오랫동안 계속 그렇게 할 것이다, 한 연작 다큐 영화로 인해 다른 식의 행동이 가능해질 때까지는. 제시의 의붓어머니는 그것을 아주 깔끔하게 요약한다. “만약 우리에게 돈이 있었다면, 이 세 소년이 지목되었을까요?” --- pp.270-271
나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자해하고 싶은 사람이 한 명도 없기를 바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해 행위나 그걸 하는 사람들을 경멸하는 대신에 그 호소 아래 채워지지 않은 욕구에 관심을 갖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다. [……] 나는 느끼기 위해 나를 벤다는 말은 커터들의 클리셰지만, 진실이기도 하다. 피를 흘리는 것은 실험이자 증명, 발굴, 드러난 내면이다. 그러고 나면 흉터는 고통의 증거로서, 잔여물로 남는다. 나는 자해가 낭만적이라거나 표현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어떤 갈망을, 증명하고픈 욕구를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아예 증거가 필요 없는 세상에 도달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만든다.
--- p.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