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도 보이티우스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나요? 억울한 일을 당해 친구나 가족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아무도 여러분을 믿어주지 않았던 적이 있습니까? 꼭 이런 큰일이 아니더라도 살다 보면 크고 작은 일을 겪게 되는데, 그런 일이 있었을 때 그 상황을 이겨내도록 힘을 준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런 경험이 없는 경우, 만약 그런 상황에 놓인다면 어디에 기대겠습니까? 이것은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보이티우스는 이런 상황에서 시선을 외부가 아니라 내면으로 돌릴 것을 권합니다. 사실 이것은 권장 사항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왜 시선을 내면으로 돌려야 할까요? 간단하게 말하자면 외부로 시선을 돌렸을 때 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보이티우스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거의 모든 것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훌륭한 귀족 가정에서 태어났고,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았으며, 최고의 관직에 오르고, 유덕한 사람과 결혼하고, 두 아들도 최고 관직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이 정도면 완벽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지 않나요? 그런데 한순간에 이 모든 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던 만큼 그 상실감도 컸습니다. 그런데 철학의 여신에 따르면 보이티우스가 불행해진 근본적인 이유는 진짜 자신의 소유가 아닌 것을 자기 것인 양 착각한 데 있습니다. 철학의 여신에 의하면 보이티우스가 ‘소유’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사실은 진짜 자기 것이 아니었고 외부에서 받은 것, 다시 말해 운이 좋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철학의 여신은 운(Fortuna)의 본질을 모르면 이런 실수를 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철학의 위안」중에서
플라톤이 왜 이성의 안내를 받는 삶을 중요하게 여겼는지 예를 들어서 설명해보겠습니다. 김대리의 목표는 다가오는 승진 시험인 토익에서 890점 이상을 받는 것입니다. 공부는 잘하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매일 꾸준히 진짜로 ‘해서’ 공부가 습관으로 자리잡아야 비로소 실력이 늡니다. 그런데 김대리가 고단한 몸을 추스르며 영어를 공부하려고 컴퓨터 앞에 앉는 순간, 게임 광고가 떴습니다. LOL에 신규 챔피언이 추가되었다네요. 이때 김대리의 첫 번째 반응은 무엇일까요? “아, 재미있겠다. 해보고 싶어!”일 겁니다. 플라톤의 영혼 분석에 따르면 이것은 김대리의 ‘욕망’에서 나온 목소리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김대리의 마음속에서 “게임 하면 영어 공부를 못하잖아. 하지 말아야 해”라고 하면서 욕망을 타이르는 목소리가 들려 옵니다. 이것은 이성에서 비롯된 경고지요. “게임을 하고 싶다”는 욕망을 따랐다가 원하는 목표인 “토익 점수 890점 이상”에 도달할 수 없다는 알림음인 셈입니다.
이렇게 상반된 두 종류의 메시지를 자각하면서 김대리의 마음속에선 작은 전쟁이 벌어집니다. 그러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면서 김대리가 게임을 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욕망이 이성을 이겼네요. 게임을 할 때는 잘 몰랐는데 막상 한판 시원하게 하고 나니, 웬걸요, 자신에 대한 분노가 치밉니다. 이성의 판단을 따르지 않고 자신이 욕망에 무너졌다는 참담한 생각 때문입니다. 플라톤에 의하면 바로 이 분노가 기개라는 부분에서 나옵니다. 이렇게 김대리처럼 자신의 내면에서 두 가지 상반된 소리를 들을 때, 우리는 ‘나 자신은 과연 누구인가?’ 하고 고민하게 됩니다(그러고 보면 내면의 갈등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지요? 자신을 더 깊이 자각하게 해주는 계기가 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이때 나의 이성과 욕망 중 누가 더 ‘진정한’ 나 자신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나, 이성인가 욕망인가」중에서
성 프란치스코(1181/2~1226)가 그 좋은 예가 아닌가 싶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이탈리아 아시시의 부유한 상인의 집에서 태어났는데, 주위에서 구걸하는 거지들을 보고 충격을 받습니다. 마음속에서 혼란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이런 내면적인 혼란과 충격이 있었기 때문에, 더 정확히 말해 그것을 기꺼이 수용했기 때문에 나중에 수많은 사람을 감동하게 한 프란시스코회를 만들지 않았습니까? 만약 그가 외부 상황에 기꺼이 자신을 노출하고 흔들리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감수성이 강한 젊은이가 아니었다면 역사는 한 명의 성인 대신에 평범한 젊은이를 만났을 것입니다. 세상에 기꺼이 자신이 흔들리도록 두었다가 나중에는 세상을 흔들게 된 장본인이 된 그의 삶을 영국 작가인 G. K. 체스터튼이 다음과 같이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그는 바람에 영원히 춤추는 앙상한 얇은 가을 잎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바람은 바로 그였다.” 물론 이런 감수성이 때로는 인생의 파멸 같은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19세기 프랑스 조각가 카미유 클로델(1864~1943)의 경우가 그런 예가 아닐까 싶습니다. 대학 시절 카미유 클로델의 전기를 다룬 영화를 보았는데 (적어도 그 영화에 소개된 바에 의하면) 클로델은 뛰어난 조각가였지만 로댕과 사랑에 빠지면서 열정에 휩싸여 파괴적인 삶을 살다 나중에 정신병원에서 쓸쓸히 삶을 마무리했습니다.
열정이 이렇게 상반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왜일까요? 혹은 왜 같은 외부 자극에 대해 사람들이 다른 반응을 보이는 걸까요? 아퀴나스는 이성의 열정 개입 여부로 그 차이를 설명합니다. 즉 외부의 자극으로 일어난 열정이 나중에 이성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그 여정과 종착역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아퀴나스에 의하면 열정이 추진력이 되어 자기만의 독특한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은(위에서 성 프란치스코의 경우), 그 열정이 이성의 인도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뜨겁지만 냉정하게」중에서
그러고는 밀은 쾌락을 두 종류로 나눕니다. 하나는 육체적인(감각적인) 쾌락이고, 또 하나는 정신적인(지적인) 쾌락입니다. 육체적인 쾌락은 말 그대로 몸으로 느끼는 감각적인 쾌락을 말합니다. 좋아하는 따끈한 커피 한잔을 마셨을 때, 이틀간 목욕을 못 했다가 뜨거운 샤워를 했을 때, 그리운 사람을 품에 안았을 때의 기쁨이 여기에 속하겠죠? 지적인 쾌락은 밀에 의하면 이성이나 상상력 등과 같은 우리가 지닌 더 고차원적인 능력을 사용해 느끼는 기쁨입니다. 친구와 깊은 이야기를 나눌 때, 대통령 후보 토론회를 들을 때, 역사 채널을 볼 때 그리고 무엇보다도 철학을 공부할 때 느끼는 즐거움이 여기에 속하겠죠? 여기서 밀이 서슬이 시퍼런 비평가를 염두에 두고 강조하고 싶었던 점은, 앞에서 이미 언급했지만, 육체적 쾌락의 경우 인간과 동물이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는 쾌락이지만, 지적인 쾌락의 경우 인간만이 유일하게 느낄 수 있는 쾌락이라는 바로 그 점입니다. 책 위에서 잠을 자는 고양이는 봤겠지만, 그 책을 읽는 고양이는 아직 본 적이 없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밀은 다른 동물들에게는 이성 능력이 없기 때문에 지적인 쾌락을 느낄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물론 많은 동물이 영리한 것은 사실이죠.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동물들을 지적이라거나 이성적이라고 하지는 않아요). 반면에 인간은 감각적인 쾌락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쾌락도 느낄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바로 그렇기에 인간은 같은 대상에 대해 더 풍부하고 다채로운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한 대상에 대해 감각적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지적인 차원에서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죠.
---「너무도 인간적인 쾌락」중에서
앞에서 유덕한 사람의 경우 자신에 대해 생각하면 뿌듯하다고 했는데 제2의 자신인 친구에 대해서도 그렇게 느낍니다. 즉 친구 역시 자신처럼 건실하다는 것을 알기에 그 친구를 보는 것이 뿌듯하고 흐뭇합니다. 이것은 친절한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 역시 친절한 것을 보았을 때 느끼는 동질감에서 오는 흐뭇함과 비슷합니다. 이런 동질감과 흐뭇함으로 인해 친구와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즐겁습니다. 그렇다면 부덕한 사람의 경우는 어떨까요? 먼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부덕한 사람이 친구를 찾게 되는 주된 이유는 자신을 잊게 해줄 누군가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아까 말한 것처럼 부덕한 사람은 혼자 있을 때면 불쾌하고 무서운 생각이 드는데, 이런 생각을 잊게 해줄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자신을 빨리 잊게 해주는 술이나 마약을 권하는 친구라면 더욱 좋겠죠. 따라서 부덕한 사람에게 친구란 자신의 공허함을 채우는 데 필요한 존재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타인과 진정한 우정을 나누려면 우선 자신이 온전하게 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그의 우정론에서 피력합니다. 나 자신이 삐뚤어져 있으면 시각도 왜곡되어 있기에 진정한 친구를 알아보지 못할뿐더러 누구를 만나더라도 진실한 관계를 유지하기 힘듭니다. 그것은 바로 명상가 존 카바친이 전하는 말처럼 “어디를 가든지 우리 자신이 거기에 있다(Wherever You Go There You Are)”라는 엄연한 진실 때문이죠. 그렇다면 진정으로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나의 가장 친한 친구 ? 그건 바로 나!」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