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쓰러지다
아내에게서 “아버님이 쓰러지셨다.”라는 연락을 받은 것은 1999년 1월 21일 밤, 가나가와 현 하코네마치에서 한창 조직혁신연구회가 열리던 때였다. 조직혁신연구회는 기업 관리직을 대상으로 하는 워크숍으로, 내가 리더로 참석한 것은 이번이 세 번째였다.
나는 아내의 말에 “지금 연수중이야.” 하고는 재빨리 전화를 끊었다. ‘무슨 그런 일로 일일이 전화하고 그래.’라고도 생각했다. 아버지도 연세가 있는데 쓰러지신 게 뭐 그리 대수라고.
하지만 아내는 급하지 않은 용건으로 회사에 전화를 걸 만한 성격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사이에 바로 전화가 왔고, “지금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다.
깜짝 놀란 나는 사정을 설명하고 연수 자리를 빠져나와 하코네에서부터 택시를 잡아탔다. 그때 택시 운전사는 집 앞에 마중 나와 있던 아내에게 “남편분이 안쓰러워서 차마 볼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요코하마로 향하던 두 시간가량 나는 줄곧 뒷좌석에 웅크리고 앉아 울었다.
쉴 새 없이 흐르던 눈물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었다.
하나는 순수하게 아버지를 잃은 슬픔의 눈물이다. 말도 잘 섞지 않고 속내도 터놓지 않는 부자 사이였지만, 아버지는 서투르나마 애정을 다하며 나를 소중히 키워주셨다. 남보다 갑절은 더 많은 경험을 쌓게 해주셨다. 그런 아버지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제부터 내 앞에 펼쳐질 사태에 대한 공포의 눈물이었다.
---「청천벽력」중에서
장례식이 끝난 후에는 금융기관 두 곳에서 문상을 받았다. 한 곳은 대형은행으로 지점장 대리가 와 있었다. 또 한 곳은 지역 신용금고로 중역이 와 있었다.
두 은행 모두 이야기는 한결같았다.
“저, 앞으로 회사는 어쩌실 생각이신가요?”
어떻든 저렇든 나는 아직 혼란스러워서 그런 판단을 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물론 기린맥주를 그만둘 생각도 없었다.
그래서 “저는 직장에 다니고 있는 데다가 한시라도 빨리 업무에 복귀해야 해서….”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대형은행에서 쐐기를 박듯 말했다.
“만일 아드님이 회사를 물려받지 않는다면 어머님께서 사장 자리에 앉아야 하는데,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청천벽력」중에서
400억 원이라는 숫자의 임팩트
기린맥주에서의 만족스러운 회사생활, 꿈에 그리던 이상적인 가정생활, 그런 삶을 실현하고자 지금까지 내가 해온 노력…. 그런 것들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그와 동시에 회사가 망했을 때 주위에 입힐 피해, 어머니의 당혹스러워하는 표정, 고맙다는 말조차 전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버린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라서 도저히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래, 내가 회사를 물려받자.’ 하고 결심한 후에야 비로소 나는 ‘주식회사 유사와’의 결산서를 들여다보았다.
내용을 확인한 순간, 말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온몸에 힘이 풀려서 의자에서 일어설 수 없었다.
부채총액 40,000,000,000원
(중략)
회사원인 내가 상상할 수 있는 ‘큰돈’의 수준을 월등히 넘어선 금액이었다. 결산서에 쓰여 있던 그 숫자의 임팩트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청천벽력」중에서
불가능한 약속을 거듭하는 스트레스
회사를 물려받았다고는 해도 당장 내가 할 일은 ‘현금흐름표’, ‘선일자수표’, ‘각서’ 이 세 가지를 들고 이곳저곳을 찾아가 사죄하는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현금흐름표를 보시면 아시다시피 현금이 없어요. 지불할 수 있는 금액은 밀린 미지급금 중 1,000만 원뿐입니다. 이번에는 이 선일자수표로 어떻게 안 될까요? 나머지는 다음 달 말까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마련하겠습니다. 지금 말씀드린 내용을 각서로 써왔으니 아무쪼록 부탁드립니다.”
(중략)
듣자 하니 “수도광열비는 끊기기 바로 직전에 낸다.”고 했다. 그래서 독촉장이 날아와도 “아직 안 끊기니 괜찮다.”는 것이었다. 특히 수도는 사실인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기본적으로 안 끊긴다.”고 믿고 있었고, 그 결과 수도요금만 해도 수천만 원이 체납되어 있었다.
하지만 안 끊긴다고 해서 계속 내지 않으면 높은 가산세와 연체료가 붙는다. 평범하게 직장생활을 하며 상식적으로 살아온 나로서는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바닥보다 더 깊은 바닥」중에서
일기예보에 바들바들 떠는 나날
음식점은 원래 현금 장사라 그날 번 돈을 바로 결제에 충당할 수 있어서 자금 변통이 어려워지기 힘든 구조다. 하지만 유사와는 그조차도 뜻대로 되지 않을 만큼 어제 매출로 오늘 결제를 메꾸며 근근이 버티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가장 낭패스러운 일은 주말의 비였다.
날씨가 궂으면 손님이 눈에 띄게 줄었고, 수천만 원 단위로 입금액이 달라졌다. 그것은 다시 말해 월요일에 결제할 돈이 없어진다는 의미였다. 돈을 갚지 못하면 또 사죄하러 가서 결제일을 늦춰달라고 부탁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유로 주말에 비라도 내리면 머리를 쥐어뜯었다. 정말이지 환장할 지경이었다. “제발 비가 오지 않게 해주세요.” 하며 정성을 다해 빌고 또 빌었다.
기상캐스터가 “이번 주 날씨입니다. 주말에는 강한 비가 내리겠습니다.”라고 말하면 우울함이 극에 달해 화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바닥보다 더 깊은 바닥」중에서
아내와 함께 새벽같이 일어나 회사에 출근하고, 사무실 직원들이 모두 돌아간 후에도 밤늦게까지 둘이 남아 일했다. 퇴근길에는 문 닫기 직전인 슈퍼마켓에서 떨이 채소를 사다가 초라한 저녁 식사를 했다. 지칠 대로 지쳐서 대화조차 없었다. 매일 그런 생활이 반복되었다.
직장에 다닐 때는 회사 근처에서 만나 맛있기로 유명한 음식점 이곳저곳을 다니곤 했다. 그런데 이제는 식탁에 마주 앉아 떨이 채소나 먹으며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 우리 두 사람 모두 운명의 장난에 농락당하고 있었다.
---「바닥보다 더 깊은 바닥」중에서
지하철 투신 미수 사건
어느 날 나는 국세국에 체납액 납부 문제로 불려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우울한 기분으로 오테마치 역 플랫폼에 서 있었다. 새 담당자는 전임자와 달리 모질고 냉정한 남자였다.
담당자에게 상당히 벅찬 납부 계획을 강요받은 나는 지하철을 기다리면서 앞으로 어떻게 할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나저나 이제 더는 못 버틸지도 모르겠군.’
‘이제 한계인가.’
‘요구대로 납부하지 못하면 어쩌지.’
그때였다.
갑자기 몸이 플랫폼에 들어오는 전철 쪽으로 기울어지나 싶더니 나도 모르게 선로에 뛰어들려 하고 있었다.
나 자신조차도 그 순간 벌어진 일이 믿기지 않았다. 궁지에 몰려 있기는 했지만 결단코 죽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내 잘못으로 진 빚도 아닌데, 그것 때문에 죽는다는 건 너무 억울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랬는데도, 그렇게까지 확실하게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있었는데도, 그때 내 몸은 틀림없이 선로를 향하고 있었다. 분명히 삶을 중단시키려는 행동을 하려고 한 것이다.
---「바닥보다 더 깊은 바닥」중에서
무엇이 늘어나든 날짜만은 확실히 줄어든다
이 5년, 즉 1,827일분의 ‘일일 달력’을 만들었다. 아내의 도움을 받아 수작업으로 완성했다. 그리고 침실에 걸어두었다.
‘오늘도 회사는 망하지 않았어.’ ‘오늘 하루도 그럭저럭 버텼구나.’ ‘나도 회사도 아직 살아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잠자리에 들기 전에 달력을 한 장씩 넘김으로써 내일을 향한 집념을 굳건히 유지할 수 있었다.
잠자리에 들기 직전에 ‘아, 오늘 하루도 끝났다. 이제 1,800일 남았어.’ 하며 달력을 넘기는 그 순간만큼은 마음이 홀가분했다.
괴롭고 굴욕적인 일이 있더라도 어쨌든 하루는 지나간다. 하루가 줄면 다시 늘어나는 법은 없다. 빚은 늘어날지도 모르고 상황이 나빠질 수도 있지만 날짜만은 반드시 줄어들었다. 그것이 정말 감사했다. 카운트다운의 효과는 절대적이었다.
---「딱 5년의 승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