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의 에너지 미래는 경제성장부터 산업 경쟁력, 국민 건강과 안전, 환경과 장기적 미래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중요한 문제다. 그러나 원자력 갈등으로 대표되는 끝없는 논쟁에서 보듯이, 우리는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해 합의는커녕 차분히 토론해볼 기회조차 거의 가지지 못했다. 찬핵이냐 탈핵이냐를 떠나서, 에너지 미래와 같은 국가 대사에 관해 토론조차 하지 못하는 사이에 정책이 일방적으로 독주한다면 뒤늦은 후회를 해봐야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이다.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는 객관적인 제삼자의 입장에서 찬핵과 탈핵을 주장하는 양 진영의 전문가들을 한자리에 초청하여 그들의 주장과 논거를 분명히 하고, 공통분모는 무엇인지,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차이점은 무엇인지, 따라서 우리의 에너지 미래는 무엇이 되어야 할지를 탐색하려고 시도했다. 그리고 그 결과로 나온 것이 바로 『원자력 논쟁: 원자력 전문가가 직접 알려준 찬반의 논거』이다. --- p.4, ‘책을 시작하며’
기술 전문가 그룹의 의견에 대한 신뢰성에 대해서는, 원자력 법령 체계가 기술적 세부 사항까지 규정하고 있어 자의적 판단의 여지가 거의 없다. 특히 미국 법을 따른 안전에 관한 법은 조밀하게 정립되어 안전 확보에 관한 신뢰성은 굉장히 높다. 하지만 현재 기술 전문가들에 대한 신뢰성과 수용성은 2013년의 원전 비리 때문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 p.35, ‘1. 원전의 민주적 절차성’
한국의 원자력 정책 의사 결정 구조의 특징을 한마디로 ‘기술 관료주의’라고 표현할 수 있다. 정책학에서는 에너지 정책 같은 기술적 성격이 짙은 복잡한 공공 정책에 대한 결정은 해당 분야의 전문가와 기술적 내용을 잘 아는 기술 관료들의 배타적인 결정 영역이라고 보고 있으며, 이 같은 접근법을 기술 관료적 접근이라고 이야기한다. 사실 어느 정도 전문성이 필요한 부분에서 전문성을 중시하는 점은 바람직하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원자력같이 위험 잠재력이 매우 높은 기술에 대한 공공 에너지 정책은 한국이 지난 수십 년 동안 그래왔듯이 많은 사회적 갈등을 내포하고 있으며 상존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직간접적 이해당사자인 일반 시민과 지역 주민을 배제하고 오로지 전문가와 기술 관료들만이 공공 정책에 대한 결정을 독점적으로 행사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민주주의 원리에도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효과적인 위험관리 측면에서도 문제가 많다. 바로 참여의 문제, 참여라는 가치가 중시되어야 하는 이유다. 이 같은 참여의 문제는 이미 세계적인 기준이 되어 있다. --- p.41~42, ‘1. 원전의 민주적 절차성’
많은 부분 중에서 한국의 에너지 자급자족을 가장 먼저 강조하고 싶다. 에너지 자급자족이 불가능하면 다른 국가가 우리의 경제성을 결정하게 된다. 환경적인 문제가 있다고는 하지만 지저분한 에너지원이라도 없을 경우 외국에서 구입해 사용해야 한다. 에너지가 없으면 살 수가 없다. 우리 뜻대로 결정할 수 없다면 결국 경제성이든 환경성이든 모두 잃는다. 한국의 에너지 자급자족률은 최하 수준이고 여러 여건이 에너지 안보를 지키는 일을 어렵게 하고 있다. 에너지 자체도 적고 대부분 수입해야 하는데, 수입하는 것 자체도 많은 비용이 든다. 전력 그리드망 또한 취약하고 주변국들과의 관계 역시 우호적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에너지 안보가 중요한 이슈라고 할 수 있다. --- p.72~73, ‘2. 기후변화와 에너지 수요 대응 측면의 원전 필요성’
한국 정부는 2030년까지 온실가스를 배출전망치 대비 37% 줄이겠다는 감축 목표를 유엔에 제출한 바 있다. 한국도 발전부문에서 온실가스 감축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현재 발전부문 배출량에 비해 2030년까지 약 10% 정도 절대량으로 줄이려면(배출전망치 대비 37% 감축과 같은 수준) 재생에너지 비중을 계획보다 더 높여야 한다. 전력 수요가 선진국의 선례를 따라간다고 가정하면 발전부문에서 감축 정책의 유연성이 커진다. 저성장 추세와 산업구조의 변화로 전력 수요가 목표 수요보다 낮아질 경우 원전을 신고리 5, 6호기부터 건설하지 않고 재생에너지 발전량 비중을 20%로 높이면 2030년까지 온실가스 감축이나 전력 수급 면에서 별 문제가 없다는 시나리오가 가능하다. --- p.90, ‘2. 기후변화와 에너지 수요 대응 측면의 원전 필요성’
원자력 안전에서는 원자로의 세 가지 고유한 특성을 잘 고려해야 한다. 첫째는 원자로를 운전하면 핵분열에 의해 다량의 방사성물질이 원자로 안에, 특히 핵연료 안에 축적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방사성물질과 인간 및 환경 사이에 여러 겹의 물리적 방벽을 두어서 방사성물질이 나오는 것을 막아야 한다. 둘째는 원자로의 경우 작은 부피에서 많은 에너지를 발생시키기 때문에 이를 제대로 냉각하지 않으면 방벽들이 손상되어 방사성물질이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다. 마지막으로 더 중요한 것은 원자로가 어떤 위험 상태에 도달하여 운전을 정지하더라도 핵분열은 바로 중단되지만 원자로 안에 있는 방사성물질이 붕괴하여 여전히 상당한 양의 에너지(붕괴열, decay heat)가 나온다는 점이다. 따라서 화력발전소와는 달리 원자로는 정지 이후에도 지속적인 붕괴열 제거, 즉 냉각이 필요하다. 원자로 정지 이후 3시간 정도가 지나면 붕괴열이 정상 출력의 1% 정도로 되고, 하루가 지나면 0.5% 정도로 줄어드는데, 많은 안전계통들이 붕괴열 제거와 관련된다. --- p.106, ‘3. 원전의 안전성’
안전을 생각할 때는 전 과정 평가가 필요하다. 즉, 처음부터 끝까지, 우라늄의 채굴부터 시작하여 폐기에 이르는 것까지 생각해야 한다. IAEA는 원자력의 안전성과 보안을 이렇게 정의한다. 원자력 안전은 “적절한 운영 상황의 확보, 사고의 방지 또는 사고의 결과의 완화로 작업자, 시민, 환경을 불필요한 방사성 위해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다. 안전은 세이프티(safety)라고 하며 보안은 시큐리티(security)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보안도 안전의 범주에 넣어야 한다. 그래서 ‘원자력 연료, 방사성물질과 설비에 대한 절도, 사보타주, 허가되지 않은 접근, 불법적 전파 또는 악의적 행동의 방지, 발견 및 조치’까지도 고려해야 한다. --- p.120, ‘3. 원전의 안전성’
한국은 원자력발전소 건설비가 굉장히 저렴한 편이다. 이것이 원전의 경제성을 크게 향상시킨다. 한국에서 원전의 공사 기간은 10년 정도이지만 부지 확보, 설계 등 엔지니어링 기간을 제외하면 실제 공사 기간은 5~6년 수준이다. 이는 정부가 소유한 공기업이 공사를 관리하기 때문이다. 물론 공사 기간이 짧아진다고 해서 부실 공사를 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또 다른 이유는 공기업이 사업을 하기 때문에 자본조달비용이 매우 낮다. 제7차 전력수급계획의 적용 할인율은 5.5%였지만 한수원의 자본조달비용은 정부의 신용등급을 적용받아 3% 내외다. --- p.142~143, ‘4. 원전의 경제성’
발전원을 선택할 때는 발전원가를 고려하는데, 이에 대해 사적인 차원의 접근과 국가적인 차원의 접근은 다르다. 원자력은 초기 투자비용이 크지만 연료비는 상대적으로 저렴하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보면 원전은 만들기 전부터 폐기장 처리까지 모든 과정에 돈이 들어간다. 사적인 비용은 오로지 가동할 때 한전이나 한수원에서 부담하는 비용이라면 외부비용은 그런 것으로 인해서 우리 국민이 받는 스트레스부터 심적인 어떤 피해까지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제대로 반영을 하지 않고 있다. 특히 사후비용, 방폐장 처리 환경 피해 같은 사회적 비용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지출하는데, 이를 국가가 지불하는 것은 원전사업자가 일종의 무임승차를 하는 것과 같다. --- p.147 ‘4. 원전의 경제성’
전 세계적으로 전력 소비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지만 OECD 국가들의 경우에는 거의 증가하지 않거나, 오히려 감소 추세에 있는 국가가 많다. 그런 점에서 한국은 OECD 국가이면서 전력 소비에서는 선진국들의 추세와 다른 현상을 보이고 있다. 우리의 전력 수요는 최근 둔화되고는 있지만 지속적인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는 저탄소형 전원 구성을 위한 구조적인 변화를 도모하기가 훨씬 어려울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안정적 전력 공급을 위한 설비 확충에 중점을 두게 되고, 이는 중장기적 관점에서 최적전원 구성을 왜곡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 p.170~171 ‘5. 에너지 전환 관점의 원전 필요성’
인류의 에너지 이용 역사와 마찬가지로 원자력발전의 역사도 길지 않다. 원자력발전은 다른 어떤 에너지원과 달리 에너지 필요에 의해서 에너지원으로 사용하게 된 것이 아니라 핵무기 개발 기술이 응용된 결과다. 그래서 인간의 에너지 역사를 볼 때 굉장히 특이한 역사를 가진 에너지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시대는 석유, 석탄만이 아니라 원자력을 주요 에너지원으로 이용하고 있는 구기술 시대다. 앞으로의 시대는 재생가능에너지와 전기 위주의 시대로 바뀔 수밖에 없는 역사적 상황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5. 에너지 전환 관점의 원전 필요성’
--- p.1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