톡 까놓고 말해서, 섹스에 관한 한 조금이라도 ‘정상적인’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이 죄책감과 노이로제, 병적 공포와 마음을 어지럽히는 욕망, 무관심과 혐오 등에 시달리고 있다. 남들은 섹스에 대해 기분 좋고, 온당하며, 강박적이지 않고, 지속적이며, 안정된 태도를 가지고 있는데, 자신은 왜 그렇지 못한가 하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책망하고 고문한다. 말하자면 우리는 전반적으로 비정상적인 사람들이다. 물론 ‘정상적’이라는 것에 대한 지극히 왜곡된 정의에 대입시킬 때 그렇다는 얘기다.
이 책은 ‘섹스’라는 주제에 대해 철학적인 사색을 펼쳐보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이제 이 책의 우선적인 과제가 확실해진 듯하다. 더 격정적으로, 혹은 더 자주 성관계를 가질 수 있는 요령은, 아쉽게도 이 책의 주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성욕이 지나친 문제, 혹은 섹스를 회피하는 문제 때문에 스스로를 비정상이라 여기는 사람들에게 그 고통을 조금이나마 편하게 받아들이는 방법을 알려줄 것이다. --- p.19 왜 모두의 성생활은 '매우 이상’한가?
섹스의 골칫거리 중 하나는, 다른 것들에 비해 비교적 덜 중요한 문제이긴 하지만, 아주아주 길게 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극단적인 경우조차 가톨릭 미사시간과 얼추 비슷한 2시간 정도로, 이 정도면 꽤 길게 하는 편이고 그나마도 이런 경우는 지극히 드문 편이다.
한편, 관계가 끝난 후에는 기분이 다소 가라앉는 경향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섹스 후에 비참한 기분에 젖어드는 경우는 꽤 흔한 일이다. 한쪽, 혹은 두 사람 모두 곯아떨어지거나, 신문을 읽거나, 그 자리에서 도망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 쉽다.
대체로 이럴 때 문제는 섹스 그 자체가 아니다. 오히려 섹스와 일상의 현격한 대비가 문제다. 섹스는 특유의 다정함, 격렬함, 열정, 쾌락이 지배하는 반면, 삶의 일상적인 측면들은 반복, 지루함, 억압, 어려움, 냉담함으로 가득하다. 이 둘 사이의 격차가 너무 크기 때문에 비참한 기분에 젖어드는 것이다.
섹스는 곧잘 우리가 처해 있는 난관들을 참을 수 없을 만큼 또렷하게 부각시켜 놓는다. 게다가 성욕이 수그러들고 나면, 방금 전까지 황홀해했던 자신이 어쩔 줄 모를 만큼 부끄럽고 낯설어진다. 그와 동시에 평상시 자신의 모습이나 일상적인 관심사와 단절된 듯해서 매우 당혹스럽다. 가령 평상시처럼 점잖아지려고, 혹은 고상해지려고 애써보지만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연인의 몸을 달아오르게 하려고 열중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 p.69 문제는 섹스와 일상의 격차
성적 기벽을 없애려고 아무리 애를 쓴다고 해도, 섹스는 결코 기대만큼 단순해지거나, 유쾌해지지 않는다. 섹스는 근본적으로 민주적이지도 친절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잔학성이라든가, 위반, 정복하고 모욕을 주려는 욕망 같은 것들과 관련이 깊다.
섹스는 우리의 기대와 달리 사랑 위에 얌전히 앉아 있길 거부한다. 아무리 길들이려고 애써도 평생토록 자꾸자꾸 말썽을 일으키곤 한다. 관계를 파탄으로 몰고 가거나, 생산성 향상에 지장을 주기도 하고, 야한 옷차림의 이성에게 작업을 걸기 위해 새벽까지 나이트클럽에서 노닥거리게 만들기도 한다. 비록 그 이성의 옷차림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어떻게든 살을 비벼보고 싶을 정도로 섹시하다면 말이다. 또한 섹스는 때때로 우리의 가장 중요한 의무나 가치관에 모순되며, 심한 경우 서로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정면충돌을 하기도 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대개의 경우에 우리는 성욕을 억제하는 것 외에는 어쩔 도리가 없다.
하지만 당혹스러운 성적 충동에 좀 더 ‘정상적으로’ 반응하지 못한 것에 대해 자책하기보다는, 섹스가 본래부터 다소 이상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섹스에 대해 좀 더 현명해지기를 기대한다는 게 전혀 불가능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단지 섹스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난관들을 완벽하게 이겨내길 기대할 수 없을 뿐이다. 제멋대로이고 무분별한 그 열정을 정중히 인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최선이다. --- p.23 무분별한 그 열정을 정중하게 인정하기
섹스는 고통스러운 이분법, 즉 우리 모두가 유년기 이후에 익숙해지는 ‘불결함’과 ‘순수함’의 이분법에서 잠시 벗어나게 해준다. 섹스는 우리의 자아 중에서 가장 명백하게 더럽혀진 측면을 그 과정에 끌어들이고, 그럼으로써 그 불결한 측면을 가치 있는 것으로 거듭나게 해주며, 결국 우리의 자아를 정화시켜준다.
그런데 여기서 자아를 정화시켜준다는 말은 대체 무슨 뜻일까? 구체적인 사례를 하나 들어보자면 이렇다. 얼굴, 그러니까 우리 몸에서 가장 공개적이고 고상한 부분인 얼굴을 연인의 가장 은밀하고 ‘불결한’ 부분에 가져다 대고 열정적으로 키스하고 빨고 혀를 집어넣으면서, 상징적으로 연인의 자아 전체를 받아들여줄 때가 바로 그런 정화의 순간인 셈이다. 가톨릭 사제가 죄를 참회하는 수많은 고해자의 머리에 순결한 입맞춤을 해줌으로써 그를 가톨릭 교회의 품 안으로 다시 받아들이는 것처럼. --- p.58 보통의 연애의 점진적 발전 과정
이제는 섹스에 대한 욕망과 사랑에 대한 욕망이 평등한 지위를 갖고, 도덕적 허식을 걷어치울 때다. 사랑과 섹스는 누구나 자유롭게 느낄 수 있는 욕망이며, 동등한 가치와 정당성을 갖는다. 그러므로 사랑이든 섹스든, 상대 이성에게 그 욕망을 갈구하기 위해 억지로 거짓을 꾸미는 일은 없어야 한다. --- p.112 로맨틱과 에로틱에게 평등한 지위를
평생에 걸쳐 만족스러운 성관계가 몇 번 안 된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성관계를 무조건 자주 갖는 것을 정상으로 여기는 생각이 과연 옳을까? 섹스와 결혼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면 당연히 가장 좋겠지만, 바란다고 다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헛된 기대를 고쳐먹고, 비현실적 환상을 버려야 하는 것 아닐까? 소위 ‘무능’이라는 오명을 털어버리면서 말이다. 그래서 가끔은 침대에서 그 누구의 원망도 없이 금욕주의적 평온으로 돌아누우며, 오래된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타협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편이 더 지혜로운 것 아닐까? --- p.144 섹스와 결혼의 평화로운 공존
이제까지의 포르노가 논리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황당한 대사에 판에 박힌 캐릭터와 동물적인 행위로 장면을 가득 채웠다면, 미래의 포르노는 지성(사람들이 도서관에서 책을 읽거나 서가 사이를 거니는 장면), 친절함(거기에서 서로 다정하고 호의적인 분위기로 오럴섹스를 하는 장면), 겸손(그 모습을 들켜 당혹스러워하거나 수줍어하며 부끄럼 타는 장면) 같은 수준 높은 이미지와 시나리오로 꾸며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고매한 인간이 되느냐, 섹스만 밝히는 동물적인 존재가 되느냐의 고통스러운 선택의 기로에 놓일 필요가 없다.
--- p.192 「고결한 인간 본성을 일깨우는 미래의 포르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