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서의 종교와 정치권력
붓다 시대와 이후 불교사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세간과 출세간이라는 정교분리가 확립되었을 경우 불교의 사회적 역할과 기능이 원만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반대로 정교분리가 불완전하면, 즉 왕권과 결탁했을 경우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가는 데바닷따의 예가 좋은 교훈을 준다. 그리고 숭가왕조와 흉노, 사쌍카 그리고 이슬람의 정치세력의 예를 통해서는 정교분리의 원칙이 유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출?재가 간의 긴밀한 관계가 형성되지 못하면 무력을 앞세운 왕권에 의해 불교는 무력하고 멸망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았다. 불교교단의 구조적인 문제에 있어 출가자의 위상과 사회적 역할은 재가자와의 긴밀한 관계 속에 온전하게 수행된다. 계율 상의 문제와 함께 사표로서 출가자와 승단(僧團)의 사회적 위상은 재가자를 앞세워야만 가능하다. 정교분리 원칙과 다원주의를 지향하는 현대사회는 전적으로 불교교단을 보호하고 지원하는 정치권력을 기대할 수 없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종교가 사회적ㆍ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려면 사회와 정치계에 불교교단을 보호하고 이웃종교와 관련하여 종교적 문제를 견제할 수 있는 지도층이 필요하다. 한국정치계는 이웃 종교의 비율이 압도적이어서 종교편향과 차별이 있어왔다. 정치권력에 있어 불교교단이 무력화되지 않으려면 정교분리 등의 법이 제대로 시행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뿐만이 아니라 밖으로 유능한 재가 지도자가 정계 등에 진출하여 활동할 수 있도록 후원해야 한다. --- pp.49-50
이승만 정권의 종교정책과 불교정화
우리가 오늘날 불교와 정치권력과의 관계를 논하고 있는 이유는 역대 정부의 편향적인 친기독교정책 때문에 불교가 피해를 입었다는 것에 대한 피해의식을 토로하는 데에 그치기보다는 불교가 불교적인 본래면목을 회복하여 새로운 좌표를 설정하고자 하는 자기반성과 모색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석가모니의 원시불교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대승불교라는 불교개혁운동을 탄생시킨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정신을 회복하는 것이며, 중국의 백장청규나 지눌의 정혜결사운동 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는 의미심장한 일일 것이다.
사실 한국불교 역사에서 불교가 국가권력에 대해 비판적 소리를 낸 적이 별로 없었기에 오늘날 이런 시간을 갖는 것 자체가 상당히 의미 있고 바람직한 일이라고 본다. 근현대에 한국불교는 대체로 국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 왔고, 그것은 이승만 정권기에 일어난 정화운동 기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것이 1980년 10?27 법난 이후 최근 기독교인 대통령의 집권으로 인해 국가권력과 갈등이 생기면서, 국가권력과의 새로운 관계 정립을 모색할 수 있는 계기가 주어진 것은 한편 반가운 일이라고 본다. 다만 그것이 막연히 기독교우위정책에 대한 피해의식을 재확인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불교 자체의 본래면목을 찾아가는 본질적인 반성의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 pp.274-275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불교 차별과 배경
종교적 불평등은 극심한 사회 변혁기에 불교의 적응 능력을 저하시켰다고 말할 수 있다. 동시에 불교계를 철저하게 정권에 예속시켜 불교의 자주성과 자율성을 파괴했다. 권위주의시대의 정치적 한계라고 변명할 수 있지만 반성의 여지가 많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또한 악법으로 인해 받은 피해를 넘어 끊임없이 이어진 종단의 내분은 불교계가 부조리하고 전근대적인 집단으로 각인되는 데 일조했다. 현대사회의 특징이 이미지시대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물적인 피해뿐만 아니라 수치로 환산할 수 없는 이미지의 타격을 입은 것이다.
그 근원은 물론 일제식민지에 만들어진 사찰령이다. 그렇지만 해방 공간에서 기독교 입국을 꿈꾸었던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 그리고 시대의 변화를 인식하지 못했던 교계의 지도자들에게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고 말해야 한다. 나아가 군사정권의 출현은 체제의 유지와 정권의 정당성 확보를 위해 여전히 불교계를 이용하고 탄압했다. 종단의 내분을 탓할 수 있지만 그 역시 정치공작의 산물이라는 점을 감안해야만 한다.
자연공원법 역시 마찬가지다. 이중삼중으로 통제된 상황 속에서 오늘의 불교가 존립했다. 불교의 주인은 국가나 공공기관이었으며, 출가자와 신도들은 그들의 머슴에 불과했다고 말한다면 너무 자조적인 표현이라 비판할지 모르겠다. 60년대부터 80년대의 불교계는 여전히 통제와 차별의 대상이 분명했으며, 그것은 현재도 일정 부분 남아 있는 것이다.
글을 마치면서 다시 한 번 상기시키고자 하는 것은 불교계 내부의 역량을 결집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나아가 도제의 양성과 교육을 위해 부단한 투자를 해야 한다는 점이며, 궁극적으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인생을 설계하고 삶의 의미를 느낄 수 있도록 교단의 분위기를 변화시켜야 한다. 교단쟀 자정 능력을 키워 타율적 제제가 침범할 수 없는 교단을 양성하는 것도 중요하다. 통제와 차별은 오늘의 불교를 만들었지만 온고이지신 한다면 미래의 불교는 보다 건강하고 밝아질 것이다. 그런 점에서 또는 불조의 혜명을 온 누리에 조망하기 위해서 부당한 차별과 통제가 사리지는 그날까지 전불교도가 노력해야 한다고 본다. --- pp.306-308
범불교도대회의 배경과 성격
미국 청교도들은 1776년 버지니아 권리선언(Virginia Declarationof Rights)을 채택하여 종교의 자유와 함께 종교의 사회적 책무를 정립하였다. 이 선언 16조에는, ‘종교, 달리 말해서 창조주에 대한 우리의 의무와 그 의욕의 구체적 시행 방법은 오직 이성과 확신이 지시하는 대로 따를 것이며, 결코 강제나 폭력으로 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모든 인간에게는 양심의 지시에 따라 자유로운 종교 생활을 누릴 평등한 권리가 있으며, 서로에 대하여 기독교적 관용과 사랑, 자선을 베푸는 것이 우리 모두의 상호적 의무이다’라고 하였다. 지금 한국의 보수 개신교는 기독교적 관용과 사랑, 자선의 사회적 의무라는 본연의 자세로 돌아와야 한다. 그럴 수 있도록 단호하게 충고하고, 자비롭게 대화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지금 불교계가 발휘해야 할 진정한 용기일 것이다.
--- p.353